신은별 특파원, 대지진 현장을 가다 <4신>
튀르키예 덮친 '2차 지진' 진원지 엘비스탄
'초미니' 장례식... 비석 대신 '나무 판 묘비'
튀르키예와 시리아를 덮친 지진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튀르키예 카라만마라슈주. 6일 새벽 4시 17분(현지시간) 규모 7.8의 최초 지진이 발생한 지 약 9시간 만에 규모 7.6의 지진이 나면서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졌다. 엘비스탄은 두 번째 지진으로 직격탄을 맞은 도시다. 지대가 높아 접근이 차단되는 바람에 참상이 외부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한국일보는 10일(현지시간) 엘비스탄을 찾았다. 도시는 텅 비어 있었다. 공동묘지만 붐볐다. 꾸역꾸역 몰려든 지진 사망자의 시신 수백 구가 가매장되고 있었다. 펜으로 사망자의 이름을 흘려 쓴 기다란 나무 판이 비석을 대신했다.
"웰컴 투 헬" 도시는 이방인을 이렇게 맞았다
인구 14만 명의 도시 엘비스탄. 해발 1,150미터에 있어 접근부터 쉽지 않았다. 지대가 높아 인근 지역보다 추웠다. 지진 전에 내린 눈이 발목 높이까지 쌓여 있고, 녹았던 눈이 다시 얼어붙어 도로는 빙판이었다.
도심은 형체만 남았다. 건물 잔해를 파헤치는 굴삭기 소리만 요란했다. 오후 2시. 하루 중 가장 따뜻한 시간대였지만 기온은 영하 4도를 가리켰다. 상가 건물이 무너진 곳에 주민들이 추위를 견디며 모여 있었다. "아이 엄마가 갇혀 있는데 살아있는지 아닌지 모르겠다"고 했다.
다른 곳에선 사람의 흔적을 찾기 어려웠다. '사람 소리'가 유독 크게 나는 곳이 유일하게 한 군데 더 있었다. 공동묘지였다. 지진으로 사망한 가족과 이웃을 차디찬 땅에 묻는 사람들이 토해내는 울음소리였다.
"웰컴 투 헬(Welcome to hell)." 공동묘지를 찾아가는 기자를 향해 무스타파씨가 이렇게 인사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 도시가 '지옥'과 같아졌다는 뜻이 한마디에 함축돼 있다. 튀르키예 언론에 따르면, 공식 확인된 사망자는 900여 명(13일 기준). 그러나 무스타파씨는 "5,000명 이상이 죽었다"고 했다.
튀르키예 정부가 실종자를 세지 않는 탓에 사망자 수도 알 길이 없다. 확실한 건 '사람이 많이 죽었다'는 것뿐이다. 무스타파씨는 "시신이 쌓여 있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고 들어오라"며 기자를 공동묘지 안으로 안내했다.
수백 개 무덤엔 '나무 판'만 겨우 꽂혀 있었다
입구를 통과하자마자 시신 한 구가 보였다. 검은 방수천에 싸인 채 흙바닥에 놓여 있었다. 관은 어디에도 없었다. 시신 주변에 10명 남짓한 성인 남성이 모여 있다가 교대로 땅을 팠다. 30m쯤 걸었을까. 시신을 묻고 있는 또 다른 이들이 보였다.
쌓인 눈으로 하얀 바깥 세상과 달리 공동묘지는 온통 붉은 흙색이었다. 시신을 묻느라 곳곳을 파헤친 탓이다. 매장할 공간이 소진되자 원래 있던 묘 사이사이 좁은 땅에 시신을 묻었다.
무스타파씨는 한구석을 가리키며 "뉴 다이(New die)"라고 했다. 문법이 안 맞는 말이지만, 지진 사망자의 묘라는 걸 그렇게 표현했다. 그가 '뉴 다이'를 외칠 때마다 세어 보려다 포기했다. 수백 군데가 '뉴 다이'였다.
시신이 급하게 수습된 흔적이 역력했다. 시신을 묻고 고르게 다지지 못한 땅은 울퉁불퉁했다. 아이들의 묘는 더 참담했다. 몸집이 작아 묘도 작았다. 나중에 찾지 못할까 봐 벽돌을 몇 개를 쌓아 올려 표식을 만들었다. 한 남성은 "관과 비석 주문이 밀려 있어 묘지를 완성하려면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릴 것"이라고 했다.
사망자를 기리는 꽃 한 송이도 없었다. 땅을 파고 내던져 둔 삽과 곡괭이만 여기저기에 나뒹굴었다. "시신이 계속 들어오기 때문에 계속 써야 한다. 찾기 쉬운 곳에 그냥 두는 것"이라고 했다. 죽음의 참극이 실시간으로 진행 중이라는 뜻이었다.
무스타파씨도 이곳에 가족을 묻었다. 묘지 입구에 놓여 있던, 검은 방수천에 싸인 시신이 그의 고모 하르자씨의 것이었다. 고인은 건물 잔해에 매몰됐다 9일 발견됐다. 무스타파씨는 "우리 가족 20명이 한꺼번에 죽었다. 아직 찾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고 했다.
장례식은 시작한 지 10분도 안 돼 끝났다
무스타파씨는 고모의 장례식에 기자를 초대했다. 이슬람 문화권인 튀르키예에서는 장례식에 여성이 참여하지 않는 게 일반적이지만, 그는 "지옥을 살고 있는 튀르키예인들의 삶을 한국인들이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무스타파씨와 공동묘지를 도는 동안 그의 가족으로부터 "장례식을 시작할 예정이니 빨리 오라"는 전화가 왔다. 2분 만에 묘지에 도착했지만, 장례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가족들은 하르자씨의 무덤을 흙으로 대충 덮어 두고 기도했다. 알라신에게 고인의 명복을 비는 것이라고 했다.
장례식은 10분도 안 돼 끝났다. 장례식이라기엔 무덤 앞에서 한 번, 공동묘지 입구에서 한 번, 두 번 기도하는 게 다였다. 사랑하는 이에게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는 시간이라기에는 야속하게 짧았다. 무스타파씨는 "사람이 너무 많이 죽었기 때문에 모든 절차를 빠르게 진행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하르자씨처럼 신원이 확인됐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이름이 적히지 않은 나무 판이 수도 없이 꽂혀 있었다. 사망자의 스카프, 모자 등으로 신원을 표시해 둔 곳도 많았다.
튀르키예 재난관리국(AFAD)은 "시신 발견 후 5일 안에 무조건 매장 절차를 밟으라"는 지침을 내렸다. 지진 참사가 수습된 뒤 신원을 확인하겠다고 정부는 약속했지만, 지켜질지 알 수 없다.
실종자 셀 수 없는데... 시장 "구조 마무리" 발언까지
엘비스탄 시민들은 정부가 구조 작업을 늦게 시작해 사망자가 늘었다고 원망했다. 한 남성은 "지진 이틀 후에야 정부가 본격적으로 구조를 시작했다. 그때까지 우리는 버려져 있었다"고 했다.
메멧 구루부츠 엘비스탄 시장의 발언은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그는 9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탐색과 구조 노력은 완료됐다. 모든 보고서 작업이 마무리됐다. 건물 잔해 아래 가족이 있다고 생각하면 개별적으로 접수하면 된다"며 구조 종료를 선언했다. 지진으로 통신이 마비되고 휴대폰이 없는 시민도 많은데 '개별적으로 접수하라'는 말은 무책임했다.
시장은 "오해"라며 글을 삭제했지만, 시민들은 "국가가 우리를 속이고 있다. 국가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느냐"며 울분을 토했다. 응답해야 할 국가는 그러나 어디에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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