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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 내부에서 누군가는 써야 했다" 고베 대지진 현장 지킨 정신과 의사의 기록

입력
2023.02.16 19:00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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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일'

고베 대지진 현장에서 무너져 내린 사람들의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노력했던 정신과 의사 고(故) 안 가쓰마사의 삶은 2020년과 2021년,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일'이라는 제목의 드라마와 영화로도 만들어져 일본 사회에 울림을 전했다. NHK 드라마 캡처

고베 대지진 현장에서 무너져 내린 사람들의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노력했던 정신과 의사 고(故) 안 가쓰마사의 삶은 2020년과 2021년,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일'이라는 제목의 드라마와 영화로도 만들어져 일본 사회에 울림을 전했다. NHK 드라마 캡처

"힘내"라는 응원 표현은 때때로 절제되어야 한다. 적어도 재난에 있어서만큼은 그렇다. 기록적인 재난이 덮친 폐허에는 긴급 구호품, 자원봉사 등 온갖 온정의 손길이 모여든다. 갑작스럽게 삶의 터전이 파괴되고, 사랑하는 이와 생사를 달리했으며, 생업을 잃고 빚을 떠안은 이재민들의 귓바퀴에 곳곳에서 몰려든 응원이 웽웽 맴돈다. "이겨 내자, 포항!" "튀르키예, 힘내!"

28년 전, 1995년 일본 고베 대지진의 상황도 꼭 같았다. 6,434명이 사망하고 재산 피해가 10조 엔에 달한 대형 재난. 길목마다 '힘내라 고베' 플래카드가 나부꼈으며, 정부는 '부흥 계획'을 설파했다. 그런데 이재민 다수는 '조증'의 증상을 보였다. 재난 지역을 향해 쏟아지는 세계의 관심과 지원으로 인해, 마치 재난 상황을 '축제처럼' 느끼는 것이다. 외부인에게는 좀처럼 이해되지 않는 광경이다.

1996년 4월, 산토리학예상 시상식에서 안 가쓰마사(가운데)와 그의 가족. 후마니타스 제공

1996년 4월, 산토리학예상 시상식에서 안 가쓰마사(가운데)와 그의 가족. 후마니타스 제공

"'재난 지역 내부에서' 누군가가 쓸 필요가 있다." 그래서 당시 35세의 젊은 자이니치 정신과 의사 안 가쓰마사는 이 책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일'을 썼다. 스스로도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가 발현돼 혼란스럽긴 마찬가지. 그러나 마음을 다친 사람들이 공통으로 겪는 '이상한 경험'을 글로 남겨 두고 싶었다. 언론의 재난 보도 방식에도 문제의식을 가졌다.

그는 대형 재난에서 직접 목격한 여러 심적 외상의 양상을, 임상 사례를 통해 분석했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들의 곁에 머물며, 마음의 상처가 어떻게 변화해 가는지도 짚었다. 지진을 입에 올리기도 싫어했던 이재민들은 조금씩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번 대지진에서 '부흥'이라는 말이 쓰이고 있지만 저는 그 말이 싫어요. 우리 같은 사람에게는 부서진 건 부서진 것대로 남아 있어요." 지진으로 아내와 딸을 잃고 살아남은 남성의 말이다. '혼자 살아남은 게 후회스럽다'는 생존자의 죄책감, '도와달라는 요청에 응할 수 없는 무력감'을 토로하는 소방대원. 집단적으로 겪는 슬픔 속에는 다양한 결의 감정이 뒤섞여 있다.

마흔이 되기도 전인 2000년 암으로 짧은 생을 마감하는 바람에, 책은 저자의 유고집으로 남았다. 이번에 국내 번역 출간된 책은 지진 직후부터 1년간 산케이신문에 '재난 지역의 진료기록부'라는 제목으로 연재한 칼럼을 엮은 초판(1996년)에, 이후 지진 피해 복구 과정에서의 변화를 관찰하며 쓴 글을 그의 사후에 엮은 신증보판(2019년)을 기반으로 한다. 초판으로 그는 1996년 산토리학예상을 수상했다.

'PTSD'나 '마음돌봄' 같은 개념이 잘 알려지지 않았던 28년 전 이야기라, 임상 관점에서는 다소 구문으로 읽힐 수 있겠다. 하나 "곁에 있어 주기" "격려하지도 비판하지도 말고 상대의 이야기를 경청하기" "이재민과 자원봉사자 간 수평적 관계 맺기" 등 재난 현장에서 그가 발밑의 잔해를 느끼며 길어낸 세심하고 사려 깊은 교훈에는 유효기간이 없다.

안 가쓰마사 지음ㆍ후마니타스 발행ㆍ320쪽ㆍ1만8,000원

안 가쓰마사 지음ㆍ후마니타스 발행ㆍ320쪽ㆍ1만8,000원



이혜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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