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88년생 이동수 청년정치크루 대표와 93년생 곽민해 뉴웨이즈 매니저가 2030의 시선으로 한국정치, 한국사회를 이야기합니다.
베트남 꽝남성을 찾은 건 4년 전 여름이었다. 그때 나는 베트남전쟁에 관한 책을 쓰면서 한국군에 의해 민간인학살 사건이 벌어진 지역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휴양지인 다낭과 호이안의 중간쯤 위치한 하미마을도 그중 한 곳이었다. 몇백 명 살지 않는 이 작은 농촌 마을은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이야기가 나오면 꼭 빠지지 않는 퐁니·퐁넛 마을과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하미마을에서는 1968년 2월 25일 135명의 주민이 희생되었다. 그날 아침, 우리나라 청룡부대 2개 중대가 마을 주민들을 집결시켰다. 평소 친분이 있는 부대였던 까닭에 주민들은 순순히 한국군의 지시를 따랐다. 그러나 그날 돌아온 건 보급품 등의 선물이 아닌 총탄이었다. 살아남은 사람은 스무 명 남짓에 불과했다. 하미마을 한쪽에는 그들의 비극적 희생을 기리기 위해 커다란 위령비가 세워졌다. 2000년 월남참전전우복지회가 비용을 지원하여 건립된 것이다. 그런데 위령비 뒤편에 '한국군에 의한' 학살 경과를 새긴 걸 두고 단체와 유가족 사이에서 의견이 엇갈렸다. 양측은 갈등을 빚다가 결국 연꽃이 그려진 대리석으로 해당 비문을 덮었다. 화려한 연꽃 그림은 베트남전쟁으로 인한 상처와 화해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지난 7일 우리나라 법원은 베트남전쟁 당시 파월 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피해에 대해 우리 정부가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법원은 1968년 2월 꽝남성 디엔반현 퐁니·퐁넛 마을에서 민간인 74명이 희생된 학살 사건이 우리나라 군대에 의해 자행된 것임을 공식 인정했다. 반세기 전 일어났던 비극은 이제야 화해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화해의 사전적 정의는 싸움을 멈추고 서로 가지고 있던 안 좋은 감정을 풀어 없애는 것. 이는 가해자가 내민 손길을 피해자가 잡아줄 때 비로소 완성된다. 그러나 세계사에서는 종종 가해와 피해의 경계가 모호할 때가 있다. 가해자가 동시에 피해자가 되는 경우도 있다. 이역만리 정글에서 꽃다운 청춘을 바쳐야 했던 한국군들은 그런 존재일 것이다.
베트남전쟁에선 전면적인 전투가 일어난 적이 거의 없다. 대신 게릴라에 의한 산발적인 전투가 끊임없이 벌어졌다. 전장과 주둔지의 경계가 불분명했던 탓에 병사들은 쉴 때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거기에 무덥고 습한 날씨와 각종 벌레, 그리고 풍토병은 전투 이상으로 군인들을 괴롭혔다. 1987년 개봉한 미국 영화 '플래툰'에서는 그런 이유들로 점점 미쳐가는 병사들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이런 배경은 모두 무시한 채 한국군을 단순히 학살자로 매도하고 그들에게만 책임을 묻는 건 부당한 일이다. 누군가는 손가락질로 양심의 가책을 덜겠지만 그것은 온전한 화해의 방법이 될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선 한국군 또한 냉전이라는 세계사, 개발독재라는 한국사의 피해자인 이유에서다. 우리나라의 경우 5,099명의 청년이 생전 가본 적 없는 밀림 속에서 목숨을 잃었고 1만962명이 다쳤다. 그보다 더 많은 수의 참전용사들이 평생을 고엽제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외면했고 그렇게 베트남전쟁은 모두에게 상처로 남았다. 그 상처가 아물지 못한 채로 반세기가 더 지났다.
베트남전쟁이 우리에게 안겨준 전쟁특수는 막대했다. 군인들이 송금한 어마어마한 액수의 외화는 눈부신 경제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다. 덕분에 대한민국은 선진국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결국, 우리는 모두 베트남 국민과 참전용사들에게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베트남에 용서를 구하는 동시에 조국을 위해 젊음을 바친 참전용사들에게 위로를 건네야 할 의무도 있다. 오래된 전쟁의 상처를 매듭짓는 일은 그들이 아닌 우리의 몫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