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1년, 우크라이나를 다시 가다] <1신>
전쟁 초 처참히 파괴된 부차·이르핀·호스토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이달 24일(현지시간)로 1년이다. 우크라이나인들은 예상하지 못했다. 21세기에 국가가 '영토 약탈'을 내걸고 국가를 침략할 수 있다는 것도, 국제사회가 무력한 나머지 전쟁이 이렇게 길어지리란 것도.
한국일보는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북서쪽의 외곽 도시 부차, 이르핀, 호스토멜을 이달 16, 17일 취재했다. 전쟁 초기 우크라이나·벨라루스 국경을 넘은 러시아군이 키이우로 진격하며 참혹하게 짓밟은 곳이다. 한국일보는 지난해 6월에도 도시 세 곳의 참상을 취재했다.
시민들은 삶의 터전을 러시아군이 파괴할 때의 공포를 여전히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미사일과 총탄의 흔적은 복구되지 않은 채 도시 곳곳에 남아 있었다. 8개월 전과 달라진 것도 있었다. 시민들은 더 이상 절망에 빠져 울기만 하지 않았다. "반드시 괜찮아지고야 말겠다"고 의지를 다졌다. 장보기, 산책, 출근 같은 일상이 다시 시작됐다.
#1. 부차: 대량 학살 현장엔 묘비조차 없지만...
키이우에서 약 30㎞ 거리의 부차. '대량 학살의 도시'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러시아군이 점령했다 떠난 부차에선 러시아군이 살해한 것으로 추정되는 민간인 시신 수백 구가 발견됐다. 러시아의 '잔혹함'을 상징하는 장소여서 우크라이나를 방문하는 외국 정치인들이 꼭 들르는 곳이다. 최소 300명이 희생당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피해 규모는 여전히 조사 중이다.
17일 대량 학살 희생자 시신 수백 구가 묻힌 부차의 한 교회 앞 마당을 찾았다. 1년 가까이 지났는데도 묘비조차 세워지지 않았다. 무덤을 밟지 못하게 설치한 가느다란 나무 막대기, 드문드문 서 있는 작은 십자가가 공동묘지임을 알렸다. 우크라이나 국기 색인 노란색·파란색 꽃과 인형도 군데군데 놓여 있었다. 한 십자가에 걸린 깨끗한 목도리가 '누군가 이곳을 찾아온다'는 것을 일러줄 뿐, 인적 없이 적막했다.
이러한 풍경은 지난해 6월과 거의 같았다. 당시 시신이 묻힌 공터 주변에 묘를 단장하기 위해 가져다 둔 석판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곧 추모 공원이 조성될 예정이라 준비한 것"이라고 당시 주민들은 말했다. 그러나 석판은 사용되지 않은 채 같은 자리에 놓여 있었다. 전쟁이 기약 없이 길어지면서 추모 공원 조성도 미뤄지고 있는 것이었다.
절망만 있는 건 아니었다. 교회 지하 예배당에는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꽂아둔 촛불과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들을 응원하려 꽂아둔 촛불이 나란히 불타고 있었다. 교회 방문자들은 예배당 탁자 위에 빵, 음료수, 과자 등이 담긴 꾸러미를 올려두고 갔다. 처지가 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먹을 것을 나누는 것이라고 했다.
마을엔 활기가 돌았다. 시민들은 "러시아군의 총칼을 피해 피란 갔던 사람들이 거의 다 돌아온 것 같다"고 입을 모았다. 슈퍼마켓, 식당, 카페 등도 전쟁 전처럼 '정상 운영' 중이다. 러시아군의 기반시설 공격으로 한동안 끊겼던 전기도 최근 들어 다시 들어온다. 지난해 2월 말 부차를 떠났다가 6개월 만에 돌아왔다는 발렌트나는 "가장 중요한 것은 '러시아군이 더 이상 마을에 없다'는 것”이라며 "우리는 지금 괜찮다"고 말했다.
#2. 이르핀: 최대 규모 학교가 문을 닫았지만...
이르핀 역시 전쟁의 참상을 상징하는 도시다. 러시아군은 전쟁 초기 이르핀과 키이우를 잇는 다리를 파괴했다. 피란길에 올랐던 시민들은 고립된 채 부서진 다리 밑에 숨어 벌벌 떨었다. 하얗게 질린 이들의 표정을 담은 사진이 외신을 통해 전 세계로 타전되며 충격을 안겼다.
이르핀의 상흔은 여전했다. 공습으로 파괴된 건물들은 방치돼 있었고, 도로에 깊게 파인 미사일 자국도 선명했다.
한국일보는 이르핀 최대 학교였던 '3번 학교'를 지난해 6월에 이어 다시 찾았다(우크라이나에선 학교 이름 앞에 번호를 붙인다. 한국과 학제가 달라 초·중·고 통합 학교가 많다). 전쟁 전엔 약 2,000명의 학생이 다녔지만, 단 한 명의 학생도 만날 수 없었다. 지난해 취재 때는 가라테를 가르치는 교사가 학생들과 '자체 수업'을 하고 있었지만, 그조차 사라졌다. 학교 옆 놀이터에서 손자와 시간을 보내던 마르나는 "학교가 곧 복원될 것이라고 들었다"고 했지만, 기약은 없다.
더디지만 이르핀 역시 회복되고 있었다. 파괴된 이르핀 다리 바로 옆에서 새 다리 건설 공사가 한창이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전쟁의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무너진 다리를 그대로 두기로 했다.
8개월 전 복구 공사를 하고 있었던 건물이 완공돼 대형 슈퍼마켓이 입주해 있었다. 집과 가족을 잃은 사람들을 위한 기부 물품이 쌓여 있었던 정자는 더 이상 붐비지 않았다. 시민들이 생활의 안정을 어느 정도 찾았다는 뜻이었다.
#3. 호스토멜: 군사도시라 '대공습 우려' 컸지만...
도시 3곳 중 가장 북쪽에 있는 호스토멜은 군사도시로, 러시아군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지난해 3월까지 군부대를 러시아군이 숙소로 사용했지만, 지금은 우크라이나군이 쓰고 있다. 우크라이나군 간부 A씨가 "구체적 장소를 기사에 쓰지 말라"는 단서를 달아 부대 내부를 보여 줬다.
러시아군이 남기고 간 흔적이 가득했다. "러시아군이 점령했다"는 의미에서 페인트 스프레이로 그린 '브이(V)' 표식, 우크라이나 국민들을 향한 조롱의 글귀가 벽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조명이 전부 부서진 탓에 병사들은 휴대전화 플래시를 켜고 이동했다. 난방 시설이 망가지고 창문도 깨진 상태라 건물 내부 기온이 영하를 가리켰다.
"전쟁 1년에 맞춰 푸틴이 대규모 공습을 가할 것"이라는 관측이 무성한 상황에서 호스토멜의 우려와 긴장은 어느 도시보다 컸다. 군인들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A씨는 "우리는 철저한 대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부대 옆에는 6월엔 없었던 매점들이 들어서 있었다. 매점 안에서는 우크라이나 병사들이 핫도그 등을 먹으며 잠깐의 휴식을 즐겼다.
키이우 시민들 역시 극복을 위해 애썼다. 계엄령이 내려진 상태라 총을 든 군인과 경찰이 도시 곳곳에 배치돼 있었으나, 관광명소에선 놀러 나온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거리공연을 하는 예술가도 있었다. 키이우에선 오후 11시부터 다음 날 오전 5시까지 시민들의 통행이 전면 금지되지만, 오후 10시 넘어서까지 만원인 시내 식당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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