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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니까 인생... 나를 아프게 한 가시들이 오히려 나를 살아있게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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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니까 인생... 나를 아프게 한 가시들이 오히려 나를 살아있게 했죠"

입력
2023.02.2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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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만 유은복지재단 장애인근로사업장 대표
1994년 장애인 자립 위해 사업 시작
2000년 경북 첫 장애인 수용 아닌 근로사업장 설립
2번의 사기로 수 억원의 빚, 포기할 뻔한 했던 순간들
2005년 '새싹' 채소 재배 시작, 해당 분야 선두기업으로 우뚝
올 2월 갑자기 일어난 화재사고로 60명 장애인 일터 전소

이종만 사회복지법인 유은복지재단 장애인근로사업장 대표가 지난달 27일 사업장에서 일어난 화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민규 기자

이종만 사회복지법인 유은복지재단 장애인근로사업장 대표가 지난달 27일 사업장에서 일어난 화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민규 기자


이 대표는 40여년 전 농아인학교를 졸업한 미혼모를 잊을 수 없다. 이 대표가 시련을 겪을 때마다 그에게 도움을 제대로 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을 벗어버릴 수 없었다. 김광원 기자

이 대표는 40여년 전 농아인학교를 졸업한 미혼모를 잊을 수 없다. 이 대표가 시련을 겪을 때마다 그에게 도움을 제대로 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을 벗어버릴 수 없었다. 김광원 기자


"애 아버지가 누구니?"

농아학교를 떠난 지 3년, 소녀 같은 농아인 아가씨는 임산부가 되어서 돌아왔다. 아버지가 누구냐고 물어도 대답이 없었다. 아기를 낳은 후 다시 물었다.

"애 아버지가 한국인은 아니구나?"

그간의 사정은 이랬다. 경북 구미에 있는 작은 봉제공장에 취직했다가 숱한 우여곡절 끝에 대구로 흘러들어왔다. 미군 흑인 병사를 만나 작은 월세방에서 살림을 차렸다. 만삭 즈음 그 병사는 훌쩍 미국으로 떠나버렸다.

아이의 아빠는 이 목사가 미군 부대를 일곱 번이나 방문해 주소를 겨우 알아냈다. 아이 엄마와 아기의 사진을 동봉해 흑인 병사에게 편지를 부쳤다. 한 달 뒤에 답장이 왔다. 단 세 줄이었다.

'나는 그 아이의 아버지가 아니다. 나의 아내가 그 아이를 입양할 생각이 없다. 더 이상 연락하지 말아달라.'

답장에 충격을 받은 아이 엄마는 석 달 남짓 몸을 의탁하고 있던 목사의 집을 떠났다. 소리 소문도 없이. 목사는 농아인 졸업생들에게 그녀의 소식을 수소문했으나 아무도 종적을 몰랐다.

석 달 뒤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대구에 있는 한 경찰서였다. 부랴부랴 경찰이 일러준 병원으로 갔다. 아이의 엄마는 교통사고로 두 다리가 부러졌고, 아기는 보호 시설에 맡겨진 뒤였다. 그날 이후 둘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그게 1986년이니까, 벌써 40년이 넘은 이야기네요. 아직도 그 아이의 소식을 모릅니다."


방학 때 집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지 못한 아이의 사연

경북 안동에서 사회복지법인 유은복지재단 장애인근로사업장을 운영하고 있는 이종만(70)대표이사 혹은 '농아인 교회 목사님'의 이야기다. 그는 젊은 시절 큰 교단의 정식 코스를 밟은 목사였다.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목사고시에 합격한 뒤에도 대형 교회로 적을 옮기지 않고 농아인들의 목회자로 남은 것은 아내의 영향이었다. 아내는 농아인학교의 교사였다.

"방학 때 고향으로 내려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아이가 있었어요. 집에 찾아가 봤더니 할머니부터 그 아이까지 6명이 모두 농아인이더군요. 아이는 놀다가 목뼈가 부러져 방에 누워있었어요. 아버지가 오일장에 가서 사온 파스를 목에 붙여놓았더군요. 하반신이 마비되었는데 결국 2주 뒤에 우리 곁을 떠났어요. 아이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면서 내 마음에 결심했죠. 농아인들의 목회자가 되기로요."

그는 처음부터 '돌보는 기관'은 관심이 없었다. 장애인들이 스스로 일을 해서 돈을 벌고 당당히 사회의 구성원으로 설 수 있는 기반을 만들고 싶었다. 구미로 취업해 떠났다 임산부가 되어 돌아온 농아인 아가씨처럼 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과 부산, 대구 등지로 취업을 나갔다가 사고에 휘말리거나 적응에 실패하는 장애인들이 너무 많았다. 이들이 당당하게 자립할 수 있도록 번듯한 '직장'을 만들고 싶었다.

그가 장애인들과 함께 생활하기 시작한 것은 1994년이었다. 경북 안동에 장애인자활자립장을 만들어 의류납품업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직접 사업가들을 만나 직접 설득해서 일거리를 하나둘씩 얻어왔다. 실적이 쌓이면서 '불량 없이 꼼꼼하게 일을 잘한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당시 유명 브랜드였던 '이랜드' 납품까지 따냈다. 그렇게 순풍을 타던 사업이 갑작스런 난관을 만난 것은 1997년이었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가 터졌다.

"하루 1,700장을 납품하던 남방셔츠가 300장 이하로 주문이 떨어지더라고요. 대출받은 돈은 순식간에 4억의 빚으로 불어나고 야반도주까지 생각이 났지만 60여명의 직원들을 외면할 수 없었죠. 반쯤 넋이 빠진 채로 일감을 찾아 전국을 다녔죠."


경북 최초 사회복지법인 장애인근로사업장 설립

2000년에 들어서자 의류시장은 다시 되살아났다. 외환위기로 저임금 지역을 찾아 해외로 공장들이 빠져나가면서 신속하게 만들어서 납품해야 하는 제품을 국내에서 생산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주문이 폭주했다. 일터를 떠났던 장애인들도 복귀해 60여명이 넘는 장애인들이 일터를 가질 수 있었다. 2년 만에 그간 빚을 다 갚고 현재 위치인 안동시 남선면에 13,223㎡의 대지를 사들여 사회복지법인 유은복지재단을 설립했다. 장애인 수용시설이 아닌 장애인근로사업장으로서는 경북 최초였다.

의류 제작 주문이 줄면서 새로운 사업아이템을 발굴해야 하는 상황에 몰렸다. 2005년 일본에서 ‘새싹’ 채소 열풍이 불었다. 한국에도 웰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던 즈음이었다. 한국 시장은 금싸라기나 마찬가지였다. 일본에서 배운 기술을 바탕으로 새싹을 재배했다. 웰빙 열풍에 새싹 상품은 내놓기가 무섭게 팔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한 업자가 찾아와 새싹의 발아시기를 앞당기고 대량 재배를 가능하게 해주는 자동화 기계를 도입하라고 권유했다.

"대전까지 가서 자동화 기계를 봤는데 눈이 휘둥그레지더라고요. 기존 방식보다 몇 배 빨리 대량으로 재배하는 게 가능하다는 설명이었어요. 업체 대표의 신분이나 서류도 완벽해 빨리 진행시켜야겠다는 생각만 앞선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업체 대표는 계약금을 받은 후 특정 부품이나 제작 공정 핑계를 대면서 현금을 받아갔다. 그렇게 가져간 현금이 1억2,000만원이 되었을 즈음, 갑자기 연락이 두절됐다. 이상하다 싶어 기계를 확인했더니 처음부터 작동조차 안 됐다. 절망도 사치였다. 공장을 놀릴 수 없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잠자는 시간도 아끼면서 새싹 재배에만 매달렸다. 문드러지는 속내와는 달리 내놓는 제품마다 날개 돋힌 듯 팔릴 때 즈음 또 한 번의 위기가 찾아왔다.

새싹 상품 판로를 찾고 있던 이 대표에게 새싹을 동결건조해 분말로 만든 후 농수산물홈쇼핑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납품하게 해주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선금 없이 판매 대금의 지분만 요구했다. 의심할 부분은 없었다. 그러나 업무 추진비만 가져가고 이뤄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분말로 만든 2억원이 넘는 새싹은 모두 퇴비로 넘겼다. 그렇게 두 번째 사기를 당했다.


이 대표가 지난달 27일 화재로 전소된 공장 내부에서 피해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김민규 기자

이 대표가 지난달 27일 화재로 전소된 공장 내부에서 피해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김민규 기자


화마로 사라진 장애인들의 일터

꾸역꾸역 앞으로 나아가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지역에서 건실한 기업으로 알려지면서 장애인들과 다문화 고령자들도 이곳을 찾았다. 새싹 재배 선두기업인데다 꾸준히 기술을 축적한 덕에 이곳에서 생산한 새싹은 서울 가락동 농수산물도매시장에서는 타 제품보다 4배 이상 비싸게 거래된다. 지난해 매출도 42억을 훌쩍 넘겼다. 장애인들의 손기술도 매출 상승의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새싹 발아의 가장 좋은 기계는 손기술이다. 신선도가 생명인 새싹은 손기술 노하우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특히 기계의 한계를 보완하는 것은 기본, 새싹을 생산하고 유통 관계자들 조차 이곳의 기술은 물론 세월과 경험이 녹아둔 ‘장인’들의 공장이라고 평하는 이도 있다. 이쪽 분야에서 국내 최고의 제품으로 대접받는다.

이제 좀 안정되나 싶었는데, 또다시 불행이 닥쳤다. 공장 화재로 25억이 넘는 재산 피해를 입었다. 화마는 지난달 27일 오전 6시 30분 즈음 공장 내부 냉동 창고에서 시작됐다. 출근 전이라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출하를 앞둔 새싹 완제품과 용기 등이 모두 불탔다. 보관창고에 있는 새싹은 물론 씨앗까지 하나도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손실돼 출하는 고사하고 공장을 계속 운영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화재보험에 가입했지만 실질적인 보상은 1/3정도 수준에 그친다.

"눈앞에서 직장이 불타는 것을 보는 내내 눈물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우는 소리를 못 듣지만 서로 눈물만 흘리는 것을 보는 자체로 그들에게는 큰 상심을 준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가장 안타까운 건 좋은 기술이 사장되는 것입니다. 무작정 도와달라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들의 좋은 기술이 다시 빛을 발휘하도록 지역사회나 행정기관에서 도움이 언제보다 절실합니다."


14일 경북 안동에 위치한 유은복지재단 한켠에서 화재 후 일부 제품들을 직원들이 옮기고 있다. 이들의 건너편에는 화재로 소실된 공장이 보인다. 김민규 기자

14일 경북 안동에 위치한 유은복지재단 한켠에서 화재 후 일부 제품들을 직원들이 옮기고 있다. 이들의 건너편에는 화재로 소실된 공장이 보인다. 김민규 기자


편집자주

불행과 고통이 안겨준 선물

이 대표가 불행을 겪을 때마다 한 가지 질문에 직면한다. 주변에서 그에게 던지는 진지한 물음이다. 이번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건네는 이가 있었다.

"이렇게 물어요. '목사님은 하나님이 '빽'이잖아요. 그런데 왜 이렇게 불행이 닥쳐요? 목사님 무슨 큰 죄라도 지은 거예요?'"

사기를 당했을 때 들었던 바로 그 질문이었다. 사기를 당하고 몇억이나 되는 돈을 잃어버렸을 때, 그 피해보다 이 대표를 더 힘들게 했던 질문이었다.

이 대표는 그럴 때마다 스스로를 돌아봤다. 순수하던 마음에 티끌이라고 섞여들었던 건 아닌지.

"폭풍이 불면 보따리가 바람에 날려갈까봐 꼭 붙들고 길을 걷잖아요. 몇 번의 폭풍에 제가 꼭 붙들었던 건 다름 아니라 초심이었습니다. 돌아보니 그렇더군요."

40년째 그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 얼굴이 있다. 만삭의 몸으로 찾아왔던 그 농아인 아가씨였다. 도무지 소식을 알 수 없는 까닭이다. 보호소에 맡겨진 아이가 어떻게 되었는지, 농아인에 하체 장애까지 입은 그 아가씨가 그 후로 어떻게 되었는지 누구에게도 소식을 전해 듣지 못했다.

병원에 누워 넋이 나간 표정으로 앉아 있던 그 표정이, 세상 모른 채 천진난만하게 웃던 아이의 미소가 기억에 남은 마지막 모습이었다. 영원히 풀 수 없는 숙제처럼 마음에 남았다. 대못 같은 가시였다. 마음 한구석에 벌을 서듯 그 기억을 손에 든 채 멍하니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차라리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면 잊어버렸을 겁니다."

며칠 전 불타버린 공장 터에 멍하니 서 있다가 불현듯 그녀의 소식이 영영 들려오지 않은 이유가 어렴풋이 짐작이 되더라고 했다.

"생각해보면 그 아이는 40년 내내 저에게 그 어디선가에서 나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는 그 '누군가'였습니다. 제가 만난 모든 사람이 그 소년이었고, 그 만삭의 아기 어머니였습니다. 제가 잘나거나 위대해서가 아니라 영혼에 박힌 큰 가시였고, 그 아픈 가시가 저를 늘 새벽에 깨우고 마음을 아프게 해서 주변을 돌아보게 만들고, 울게 만들고, 웃게 만들고, 지치지 않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게 한 힘이었습니다. 저를 여기까지 끌고 온 건 그 가시를 타고 온몸을 관통하는 아픔이었습니다."

잠시 말을 멈추고 불타 버려서 폐허가 된 공장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마지막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 소녀 같은 크고 작은 가시 하나하나가 저를 여기까지 끌고 왔습니다. 가시로 만든 제 면류관이죠. 그것을 마음에서 벗지 않는 것, 그 첫 마음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이 제가 끝까지 품어야 할 마음이자 이 사업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살아보니 아픔이 오히려 희망이었더라"면서 "우리 직원 모두 새싹처럼 순수한 마음과 싱싱한 의욕이 살아있으니, 불탄 자리에 싹이 돋듯 이 어려은 시기도 기어코 이겨낼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14일 이 대표가 불타 버려서 폐허가 된 공장에서 취재진을 멍하게 지켜보고 있다. 인근에는 화재 당시 불타버린 신문지가 널부러져 있다. 김민규 기자

14일 이 대표가 불타 버려서 폐허가 된 공장에서 취재진을 멍하게 지켜보고 있다. 인근에는 화재 당시 불타버린 신문지가 널부러져 있다. 김민규 기자


윤기웅(56·경정) 대구 성서경찰서 생활안전과장이 "이 목사와 처음 인연을 맺은건 1999년 안동경찰서 교통계에 근무할 때였다"며 "20여년 넘게 이 목사와 알고 지냈지만 소외된 이들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는 종교인이자 사업가로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빨간색 원 안은 교통지도계장(경위)시절 윤 과장이 이 목사의 수화를 따라하고 있다. 윤기웅 경정 제공

윤기웅(56·경정) 대구 성서경찰서 생활안전과장이 "이 목사와 처음 인연을 맺은건 1999년 안동경찰서 교통계에 근무할 때였다"며 "20여년 넘게 이 목사와 알고 지냈지만 소외된 이들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는 종교인이자 사업가로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빨간색 원 안은 교통지도계장(경위)시절 윤 과장이 이 목사의 수화를 따라하고 있다. 윤기웅 경정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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