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1년, 우크라이나를 다시 가다] <4신>
전쟁 중 러시아군 자행 인면수심 성폭력
전문가들 "구조적 범죄... 러시아 책임"
유엔 보고서 발췌
"2022년 3월 우크라이나 키이우주의 한 마을. 러시아 군인 두 명이 가정집에 무단 침입했다. 둘은 22세 여성을 차례로 강간했다. 여성의 남편에게도 성폭력을 저질렀다. 둘은 자신들이 보는 앞에서 부부가 성관계 갖기를 강요했다. 부부의 4세 딸도 유린했다."
유엔은 같은 마을에서 러이사군이 저지른 유사한 성범죄 3건을 더 확인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조국 수호자의 날'을 하루 앞둔 22일(현지시간) 모스크바 루즈니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조국 수호자에게 영광을' 콘서트에서 수만 군중을 향해 인사하고 있다. 모스크바=로이터 연합뉴스
러시아는 지난해 2월 24일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뒤 수많은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강간을 비롯한 성폭력도 서슴지 않았다.
성폭력 피해자는 피해 신고를 주저하는 경향이 강하다. 사회가 그들에게 강요한 수치심 때문이다. 더구나 우크라이나 피해자들은 신고했다가 러시아군에게 보복당할까 두려워 더 굳게 입을 닫는다. 현재로선 피해 규모 파악조차 어렵다는 뜻이다.
한국일보는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한 전시 강간 실태를 파악하고 국제사회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살펴보고자 현지에서 전문가들과 만났다.
(왼쪽부터) 여성 폭력 관련 인권단체인 '라 스트라다'의 카테리나 보로크디나 부대표, 러시아군의 전쟁범죄 증거를 수집한 기여를 인정받아 지난해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한 우크라이나 인권단체 '시민자유센터'의 로만 네콜리악 국제관계조정관, 러시아 전시 성폭력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위해 설립된 우크라이나 국회의 위원회에서 부위원장을 맡고 있는 인나 소우선 의원. 키이우=신은별 특파원
△러시아군의 전쟁범죄 증거를 수집한 기여를 인정받아 지난해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한 우크라이나 인권단체 '시민자유센터'의 로만 네콜리악 국제관계조정관 △여성 폭력 관련 인권단체인 '라 스트라다'의 카테리나 보로크디나 부대표 △성평등과 소수자 인권에 관심을 쏟아온 인나 소우선 우크라이나 의원 △유럽 인권 증진 등을 목적으로 설립된 '유럽평의회'의 카카비아토스 파노스 대변인을 인터뷰했다. 파노스 대변인만 서면으로 만났다.
유엔이 지난해 10월 발간한 보고서에 실려 있는 러시아군의 전시 강간 사례. 빨간 상자 안에 담긴 사례는 '러시아군 2명이 22살의 우크라이나 여성을 강간하고, 남편에게도 성폭력을 저질렀다. 그중 한 명은 4세 딸에게도 구강성교를 시켰다'는 내용이다. 유엔 캡처
"4세부터 83세까지 피해 "… 너무 잔혹한 러시아
전문가들이 조심스럽게 들려준 사례와 유엔을 비롯한 국제기구의 조사 현황으로 확인한 전시 성폭력의 실상은 참혹했다.
△우크라이나 북부 체르니우주의 한 마을을 점령한 러시아군은 83세 여성을 강간했다. 거동이 불편한 그의 남편도 성폭력을 당했다.
△지난해 3월 키이우의 한 마을에서는 러시아군이 "내 아내를 건드리지 말라"고 말리는 남편을 총살한 뒤 아내를 강간했다.
피해자 보호를 위해 성폭력 수사는 과정과 내용을 철저히 비밀에 부친다. 25년간 인권 분야에서 활동한 보로크디나 부대표는 "우크라이나 법무부가 파악하고 있는 전시 강간은 약 200건 정도인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유엔은 100건 정도를 파악했다. 라 스트라다가 별도로 운영하는 '핫라인'을 통해 접수된 사건은 32건이다.
러시아 군인들이 13일(현지시간) 러시아의 특수 군사 구역에서 다탄두 로켓을 설치하고 있다. 타스통신 연합뉴스
'상처가 커서' '두려워서' 말 못 하는 피해자들
이는 극히 일부에 불과할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소우선 의원은 "성폭력 피해자 다수가 너무 충격을 받은 나머지 우크라이나를 떠나 버렸다"고 했다. 네콜리악 조정관은 "성폭력 피해자들은 '강간당했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기는 경향이 있어서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한다"고 했다.
프라밀라 패튼 유엔 사무총장 특별대표도 한 기자회견에서 "많은 피해자가 인터뷰를 거부했고, 자살을 고려한 이들도 있었다"고 말했다.
성폭력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보로크디나 부대표는 "우크라이나 여성이 다수의 러시아군 앞에서 '옷을 벗으라'고 강요를 당했다는 사례들이 있었다"며 "일부 피해자들은 '육체적 폭력이 없었는데 이것도 성폭력에 해당하느냐'고 물어왔다"고 했다.
라 스트라다에는 한 여성이 러시아군에게 성폭력을 당했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범죄 장면을 여성의 3세 아이가 지켜봤다. 이 경우 아동도 성폭력 피해자여서 신고 대상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전쟁의 공포에 장기간 노출되다 보니 성폭력 피해를 '상대적으로 사소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인식도 신고를 주저하게 한다.
여성 폭력 관련 인권단체인 '라 스트라다'의 카테리나 보로크디나 부대표가 22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의 라 스트라다 사무실에서 만나 한국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키이우=신은별 특파원
우크라이나 여성들만 위험한 건 아니다. 네콜리악 조정관은 "분쟁 지역에서는 언론인, 인권·평화 활동가 등도 비슷한 위험에 노출돼 있다"고 했다. 남성도 피해자가 된다. 보로크디나 부대표는 "남성이 신고하는 경우는 10% 미만"이라면서도 "남성은 성폭력을 당했다는 것을 더 큰 수치로 여기기 때문에 신고 건수와 피해 건수가 더 큰 차이를 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조심스럽게' 접근... 우크라 검찰청 '챗봇' 운영
피해 사실이 끝까지 침묵에 부쳐져 러시아군 가해자들이 처벌을 면제받는 건 최악의 결말이다. 그래서 우크라이나 검찰청은 지난해 말 '성폭력 신고 챗봇'(인간과 대화하는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익명으로 신고할 수 있다.
보로크디나 부대표는 "성폭력을 당한 장소와 폭력 행위를 챗봇에 전달하는 것만으로 가해자를 특정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챗봇을 통해 정부에서 받을 수 있는 지원 등도 안내받는다.
성폭력 수사에선 '정의 구현'보다 '피해자 보호'가 우선이라는 원칙이 우크라이나에서도 지켜지고 있다. 보로크디나 부대표는 "피해자가 말하기 원하지 않는 것 이상을 요구하지 않는 관대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아동 피해자는 더 조심스럽게 조사하고 치료한다.
지난해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한 우크라이나 인권단체 '시민자유센터'의 로만 네콜리악 국제관계조정관이 20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의 사무실에서 한국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키이우=신은별 특파원
"전시 성폭력은 개인 아닌 국가의 책임"
우크라이나인에게 성폭력을 저지른 건 러시아의 개별 군인이지만, 책임의 최종 주체는 러시아 정부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았다. 전시 성폭력은 '구조적 범죄'이기 때문이다.
네콜리악 조정관은 시민자유센터 대표인 올렉산드라 마트비추크의 말을 빌려 "러시아는 성폭력을 전쟁 전략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인의 육체와 정신을 말살해 우크라이나를 정복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는 또 "러시아군 수뇌부가 병사들을 일부러 통제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고, 이미 통제가 불가능한 상태에 빠진 것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의도적으로 방관하고 있다면, 러시아 정부의 책임은 더 커진다.
"러시아 정부에 반드시 책임 묻겠다"
시민자유센터는 전쟁이 끝난 뒤 러시아군과 정부 인사들을 법의 심판대에 세우는 증거자료로 쓰기 위해 성폭력 범죄를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의회에서는 전시 강간의 철저한 조사를 위한 입법도 진행 중이다. 소우선 의원은 "의원 10여 명으로 꾸린 별도 위원회를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인나 소우선 우크라이나 국회의원이 18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의 모처에서 한국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그는 러시아 전시 성폭력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위해 최근 설립된 우크라이나 국회의 위원회에서 부위원장을 맡고 있다. 키이우=신은별 특파원
국제사회와도 협업하고 있다. 독일 등 다수의 국가에서 러시아의 전쟁범죄를 조사하기 위한 수사팀을 파견했다. 소우선 의원은 "성폭력을 비롯한 러시아의 전쟁범죄는 전 세계가 보편적으로 중시하는 '인권' 문제이므로 국제사회가 함께 조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별도의 국제기구를 설립해 러시아의 전시 성폭력을 처벌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파노스 대변인은 "러시아의 전쟁범죄만 전문적으로 다룰 국제형사재판소를 설립해야 한다는 게 유럽평의회의 굳은 입장"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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