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세상을 떠난 조세희 작가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1970년대 말 나온 소설로 산업화의 뒤안길에서 소외되고 억압된 도시빈민과 노동자의 삶을 그려냈다. '난쏘공'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 등장하는 '뫼비우스의 띠'는 처음과 끝이 없고 안과 겉을 구분할 수 없다. 소설이 쓰이던 당시 난장이 일가가 처했던 현실이 세월을 훌쩍 넘어 1인당 국내총생산(GDP) 3만 달러 시대에도 계속될 거라는 뜻이었을까. 분명한 건, 그때보다 계급 갈등을 둘러싼 사회구조적 모순은 더 깊어졌으며, 고통받는 사회적 약자들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목소리를 내는 일이 많아졌고, 한편으로 이러한 목소리를 불편해하고 혐오하는 정서도 깊어졌다.
노동조합에, 장애인들에게,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에게 향하는 조용히 가만히 있으라는 메시지는 '난쏘공'이 세상에 나왔을 때보다 더 복잡하게 얽혀 있다. 당시는 독재정권의 폭력적인 공권력이 있었다면 지금은 혐오를 전파하는 미디어 환경과 기계적인 절차만을 중시하는 거짓 공정이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언론을 통해 알려진 노동자들의 시위와 파업은 언뜻 보면 노동조합으로 인한 갈등 같지만,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가 시위와 파업을 통해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화물연대의 파업은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과 일하는 사람들에게 공정한 분배를 해달라는 주장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화물연대가 파업하기 전까지 안전운임제가 무엇인지조차 몰랐다. 사용자에 비해 현저하게 약한 위치에 있는 개별 노동자들이 단결을 통해 정당한 요구를 할 수 있도록 헌법이 보장한 권리가 바로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이다. 힘없는 노동자와 시민이 아무에게도 불편을 주지 않고 자신의 의사를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 참된 시민은 묵묵히 일만 하면 되는가.
최근 정부는 노동조합을 기득권과 부패의 온상으로 규정하고, 자율적 운영조직인 노동조합의 회계투명성을 문제 삼고, 민주노총에 대해 국가보안법을 적용하여 압수수색을 벌이는 등 해묵은 색깔론까지 동원하고 있다. 노조법 2, 3조 개정을 둘러싼 노사의 팽팽한 대결에서 정부는 중재 노력을 기울이기는커녕 대놓고 사용자 편만 들고 있다.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고 이전 정부들이 힘을 기울였던 재벌개혁, 관료개혁이 아닌 노동개혁을 들고 나온 것은 우리 사회의 아픈 고리인 노조 혐오 정서에 편승하고 심지어 조장해 나가려는 모습으로 보인다.
2021년 한국의 노조 조직률은 14.2%로 덴마크(67.0%), 스웨덴(65.2%), 핀란드(58.8%)처럼 대다수의 시민이 노동조합원인 북유럽 나라들에 비해 훨씬 적은 편이다. 낮은 조직률로 인해 시민들은 노동조합을 나의 일이 아닌 것으로 인식하고, 정부는 노조를 시민들과 분리시켜 노조 탄압을 귀족노조 길들이기로 둔갑시킨다. 노조 조직률이 높은 나라들에서는 산업과 기술 발전에 따라 발생하는 다양한 노동 이슈에 대하여 사회적 대화를 통해 해결하며, 노동조합은 이러한 논의의 당사자들이다. 시민 관점에서 보면 우리도 조직률을 높여서 어떻게 하면 기술과 산업이 노동자와 시민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한 방향으로 발전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협상할 수 있는 힘을 키워야 한다. 노조 조직률이 낮다는 이유로 오히려 혐오 정서를 조장하고 노조를 고립시켜 궁극적으로 시민사회의 힘을 꺾는 일은 오랜 시간 민주주의를 발전시켜온 우리 역사의 흐름에 역행한다. 노동자가 살 만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 먼저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