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미엄' 강의·엔데믹 수혜로 수강생 ↑
복합문화공간으로 백화점 이미지 좋아져
"수강생이 명품 구매도"…간접매출 효과
"다 다른 여성 같지만, 모두 한 여성을 그린 거예요. 연인 카미유에 대한 모네의 애정이 느껴지죠."
16일 목요일 오후 7시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백화점 본점 9층 아트전시관 '그라운드시소'. 문화센터에서 연 미디어 전시 강의를 찾은 직장인 이슬기(33)씨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대형 미디어아트로 표현된 화가 모네의 대표작 '정원의 여인들'(1866)을 보며 윤지원 아트 큐레이터 겸 첼리스트가 해설을 더하자 깊은 감명을 받은 것이다.
모네의 작품 세계를 설명하던 윤 큐레이터는 이내 첼로로 클래식 '송 프롬 어 시크릿 가든'(Song From a Secret Garden)을 연주했다. 빛의 변화를 생생하게 담아낸 모네의 작품이 첼로 연주와 어우러지면서 감동이 두 배로 다가왔다. 평일 퇴근 후 '지옥철'에 몸을 담고 집에 가기 바빴을 시간, 백화점에서 샴페인과 함께 모네의 삶에 귀 기울이고 있자니 이씨는 삶의 질이 좋아지는 것 같은 기분마저 느꼈다.
1시간 30분 동안 이어진 이날 강의는 수강료가 6만 원으로 비교적 비쌌지만 40명 넘는 수강생들이 자리를 꽉 채웠다. 대체로 구매력 있는 3040 직장인이 많이 눈에 띄었고 5060 여성들도 볼 수 있었다.
이씨는 과거 다른 장소에서 윤 큐레이터의 강의를 듣고 깊은 인상을 받아 이날 강의를 들으러 왔다. 그는 1년 전부터 백화점 문화센터를 다니기 시작했는데 올해 벌써 세 번째 방문이다. 2, 3주에 한 번꼴로 문화센터에서 클래식 해설, 술 만들기 등 다양한 강의를 듣다 보니 어느덧 문화센터 관계자와 친분도 생겼다. 이씨는 "얼마 전까지 내 삶은 회사 일과 집이 다였다면 문화센터를 다니면서 훨씬 풍성해졌다"며 "오롯이 나만을 위해 시간을 쓰는 것이라 비용은 아깝지 않다"고 했다.
백화점 문화센터에 봄바람이 불고 있다. 엔데믹(풍토병화) 시대, 더 참신하고 고급스러워진 프로그램으로 개성 강한 MZ세대(1980년대 초~2000년대 초 출생) 수강생들을 끌어들이면서다. 백화점 문화센터가 ①점포 이미지를 좋게 하고 ②고객을 끌어들이는 것은 물론 ③간접매출을 올리는 복덩이로 거듭나고 있다. 최근 백화점을 소비 공간이 아닌 특별한 경험을 제공하는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하려는 업계의 고민과도 맞물리면서 중요성은 더 커지고 있다.
'하이브리드형'·'1대1' 등 고급형 강의 크게 늘어
특히 올봄 그 어느 때보다 문화센터를 찾는 이들이 늘어날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백화점들은 고급화(프리미엄)를 키워드로 삼았다. 과거 인문학, 요리, 댄스 등 한 가지 분야에만 집중했다면 최근 '와인+인문학', '미술+클래식' 등 두 가지 분야를 접목한 '하이브리드형 강의'가 늘고 있다. 나를 위한 투자에 돈을 아끼지 않고 의미 있게 시간을 보내고 싶어하는 MZ세대의 수요를 반영해 회당 10~20만 원에 달하는 강의도 눈에 띈다.
최근 롯데백화점이 마련한 한옥에서 나만의 향수를 만드는 조향 강의는 회당 18만 원, 최대 정원 6명의 소규모 강의로 구성해 예약을 다 채웠다. 현대백화점 압구정본점은 4월 경북 군위군 사유원에서 도슨트(전시 해설가)와 함께 미술 작품을 감상하고 사색을 즐기는 강의를 회당 20만 원에 선보인다. '1대1' 요가, '1대5' 필라테스 등 소규모 체형 분석·운동 처방 강의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김영림 롯데백화점 문화센터 실장은 "예전엔 많은 수강생을 오게 해 학교 수업처럼 진행하는 '강연형 강의'가 많았다"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을 거치면서 더 프라이빗하고, 다른 곳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특별한 내용으로 바꾸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김수민 롯데백화점 문화센터 책임은 "강의를 기획할 때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리고 남들에게 자랑할 수 있을 만큼 세련되고 이색적인 요소를 심어주는 게 특히 중요해졌다"고 덧붙였다.
'주말도 아깝지 않아'…엔데믹 이후 수강생 '쑥'
평일 저녁 퇴근 후 짬을 내 강의를 듣던 패턴에서 나아가, 금쪽같은 주말 하루를 문화센터에서 보내는 직장인이 늘어난 것도 눈에 띈다. 신세계백화점은 3~5월 문센 봄 학기에 주말 강의를 늘렸는데 특히 재테크 관련 강의는 40여 개 중 30개 가까이를 주말에 집중 배치했다.
신세계백화점 관계자는 "코로나19 이전 부터 재테크 강의에 30대 직장인 수강생이 많이 찾아오면서 평일 저녁 강좌를 늘렸는데 최근에는 주말로 그 수요가 옮겨가는 추세"라며 "일상 회복으로 주말 백화점 방문객이 늘어 수강생도 많아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수강률 상승도 두드러진다. 롯데백화점 문화센터에는 이번 겨울 학기(지난해 12월~올해 2월)에 1988년 개관 이래 가장 많은 수강생이 몰렸다.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과 비교하면 10% 이상 증가했다. 현대백화점은 수강생 수가 전년 대비 약 40% 늘었다. 이에 백화점 3사는 봄 학기 오프라인 강의를 10~20%까지 추가했고 특정 점포에서만 즐길 수 있는 강의도 늘렸다.
문센 수강생 '간접매출' 효과…명품 구매도 적극
백화점이 문화센터에 이처럼 힘을 주는 이유는 이색 체험을 할 수 있는 문화 공간으로 점포 이미지를 탈바꿈하고 정기 방문하는 충성 고객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문센의 주이용층은 경제적으로 자립 가능한 30대 이상 직장인이라 백화점 수강생 모집·관리 역량에 따라 간접매출을 얻는 효과도 볼 수 있다는 설명이다.
24일 롯데백화점에 따르면 최근 5년(2018~2022년) 동안 문화센터 수강생의 구매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수강생이 일반 고객 대비 구매 횟수는 네 배, 1인당 구매 금액(객단가)은 다섯 배나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 매출 중 수강생의 명품 구매 비중이 일반 고객 대비 5%포인트 높아 럭셔리 상품군에 대한 수요도 많았다.
현대백화점은 문화센터 수강생의 객단가가 일반 고객 대비 두 배 이상 높았다. 수강생의 백화점 방문 횟수는 월평균 8회로 일반 고객(평균 2회)과 비교해 약 네 배 자주 백화점을 찾았다.
업계 관계자는 "백화점에 대한 친밀감과 긍정적 이미지가 쌓이면서 수강생들이 명품처럼 값비싼 물건도 어렵지 않게 사게 되는 것 같다"며 "그만큼 각별하게 챙겨야 할 잠재 고객으로 관리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백화점 문화센터는 특정 브랜드나 관련 상품에 대한 각인 효과도 낳는다. 이영애 인천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오늘날 백화점 문화센터는 그저 많은 소비를 끌어내기 위한 고객 선점 역할을 넘어섰다"며 "좋은 기억으로 유통 관련 트렌드를 만들고 여러 상품에 대한 호감을 이끌어내면서 백화점 운영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됐다"고 말했다.
한편 주부, 어린이 등 주말 가족 대상 프로그램에 집중했던 대형마트 문화센터도 최근 MZ세대 고객을 확보하기 위해 성인 대상 강의를 점차 늘리고 있다. 롯데마트는 겨울 학기 저녁 강좌 수강생이 직전 학기 대비 20% 증가하자 봄 학기 성인 강의를 겨울 학기 대비 30% 확대했다. 홈플러스도 자기계발과 취미를 시작하려는 직장인이 늘 것으로 보고 건강, 악기, 미술 등을 다루는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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