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1년을 맞은 우크라이나를 기록한 언론 르포를 보며 놀란 건 익히 알려진 참상 때문이 아니다. 전쟁 중이라고 믿기 어려운 일상이 유지되고 있었다. 공습경보를 삶의 일부로 여기며 수십만 명을 사상한 아픔 속에서 지켜낸 일상이었다. 한 시민은 전쟁에 휘둘리지 않고 생계 활동을 유지케 한 건 승리에 대한 믿음이라고 했다. 한계적 여건에서 그런 믿음은 대체 어디에 근거한 걸까.
1년 전만 해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점령을 호언했다. 며칠을 버틸지 미국조차 회의했다. 그렇게 한쪽에선 대통령 젤렌스키 체포조에 이은 암살조가, 다른 쪽에선 망명팀이 동시 투입됐다. 푸틴 말처럼 러시아의 패배는 불가능해 보였다. 그런 우크라이나가 지금은 남부, 동부로 러시아군을 밀어내 교착상태를 만들었다. 속국화 예상이 빗나가고 승리의 믿음을 갖기까지 그 이유는 특유의 결사항전, 자유진영의 연대가 절대적일 것이다. 젤렌스키의 지도력 등 예기치 않은 요인들도 맞물린 결과이나 여기에 빠져선 안 될 게 민간의 빅테크다. 미군이 아닌 실리콘밸리로 상징되는 IT기업들이야말로 제한적이나마 일상을 가능케 한 영웅들이다.
전쟁을 첨단무기 마케팅 기회로 삼던 군산복합체는 이번에 실리콘밸리에 손을 들어야 했다. 전쟁이 나자 아마존은 공공 및 민간 부문 데이터를 해외 클라우드에 저장해 서비스를 유지했고, 마이크로소프트는 디지털 인프라가 안전하게 서비스되도록 했다. 막사 테크놀로지는 러시아 잔혹함을 폭로했고 우버앱은 물류의 신경망을 담당했다. 이런 디지털 플랫폼의 숨은 역할이 확인된 건 공교롭게도 장애 때문이었다. 시민이 함께 쓰는 스타링크의 우주 인터넷 서비스가 한때 중단되자 전황이 불리해지기까지 한 것이다. 누구보다 휴대폰과 컴퓨터로 전쟁을 가능케 한 이 스타링크의 일론 머스크야말로 진정 영웅이란 말이 아깝지 않다.
포탄이 오가는 전장 뒤에서 사이버 공간을 지켜낸 빅테크들의 활약은 디지털 시대 전쟁의 상징적 장면이다. 이들이 방산기업들을 압도하며 전쟁 인프라를 제공한 것은 문명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다. 작년 9월 키이우를 찾은 구글 CEO 출신의 에릭 슈미트는 비정상이어야 할 도시의 정상적 가동에 경악한 듯했다. 자동차,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 승객에게 130메가비트를 제공하는 기차의 인터넷서비스까지. 워싱턴에 돌아간 그는 이 전쟁을 최초의 네트워크 전쟁으로 명명하고 우크라이나를 신기술 구현의 발사대라고 평가했다.
전쟁의 끝은 보이지 않지만 새로운 질서는 이미 꿈틀대는 것 같다. IT기술자들이 디지털 시대 군인이고, 군에만 의지해 승리하기 어렵다는 건 분명해졌다. 군대, 무기가 수행하는 전쟁방식은 바뀌지 않을지라도 빅테크 없는 국가 단독의 전쟁은 이제 생각할 수 없다. 이런 추세라면 미중 경쟁도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알리바바 텐센트 등 디지털 지배자 간 경쟁으로 이어질 것이다. 첨단무기가 경연한 걸프전은 신자유주의를 열었다고들 말한다. 그렇다면 국가, 민간 경계가 흐려진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은 초독점시대로 가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젤렌스키는 자국을 찾은 바이든 미국 대통령을 옆에 두고 “세계질서의 운명은 지금 여기에서 결정되고 있다”고 했는데 틀리지 않은 말이다. 새로운 질서에 대응하려면 무엇보다 국가와 사회가 먼저 열려 있어야 한다. 군이라면 미 펜타곤 국방혁신단(DIU)이 아예 실리콘밸리로 옮긴 데서도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멀리는 앨빈 토플러가 언급한, 시대에 뒤처진 무용지식(옵솔리지)의 위험성이 없는지, 시속 100㎞로 달리는 기업에 3㎞ 속도의 거북이 걸음 조직이 없는지 살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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