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축의 덫]
문 정부 유산 나랏빚, 제동 거는 윤 정부
명분 있지만 경기 위축 땐 재정 나서야
확장·긴축 함께 쓴 MB정부, 유연함 필요
윤석열 정부가 지난해 집권하면서 속도를 낸 전기·가스요금 인상은 공공부문 긴축 기조에서 출발했다. 한국전력공사 적자 증가, 한국가스공사 미수금 확대 등 부실해진 공기업의 재무 개선 추진 과정에서 요금 인상은 불가피했다.
하지만 올겨울 공공부문 긴축에 따른 대가를 톡톡히 치르는 중이다. 전기·가스요금 인상 여파로 난방비 폭탄이 사실상 모든 계층을 덮쳤고, 공공요금발 고물가도 기세를 이어가고 있다. 결국 윤석열 정부는 전기·가스요금을 올릴 때 "국민 부담을 우선 고려하겠다"며 공공부문 긴축 강도를 낮출 뜻을 보였다.
강도 세지는 윤 정부 긴축
윤석열 정부가 공공부문 긴축 기조를 밀어붙이면서 부작용이 발생했듯, ‘닮은꼴 정책'인 긴축 재정을 경직적으로 운용하면 문제가 생길 가능성도 제기된다. 허리띠를 너무 조였다간 되살아날 기회 자체를 놓치는 '긴축의 덫'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부가 집권 후 처음 짠 2023년도 예산안 규모는 전년 대비 5.1% 늘어난 639조 원이다. 문재인 정부 집권 5년 평균 증가율인 8.7%를 크게 밑돈다. '짠물 예산'의 농도는 윤석열 정부 집권 후반기로 갈수록 짙어진다.
기획재정부가 지난해 작성한 '2022~2026년 중기재정운용계획'을 보면 정부 예산 증가율은 2024년 4.8%, 2025년 4.4%, 2026년 4.2%로 점점 내려간다. 예산 증가율은 예측치라 변동 가능성이 있으나 해마다 긴축 강도가 강해진다. 긴축 재정을 집권기에 뿌리내리겠다는 윤석열 정부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는 전망이다.
문제는 윤석열 정부가 긴축 노선으로 기울수록 재정 정책도 경직적으로 변한다는 점이다. 특히 긴축에 매몰된 재정 정책은 올해처럼 경기가 하강하고 있는 시기에 엇박자를 내기 쉽다. 경제가 꺼지고 있는 가운데 적절한 규모의 예산을 제때 쓰지 못하면, 경기 반등에 실패할 수 있어서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는 "국가채무비율은 낮아야 한다는 막연한 신념에 따라 긴축에 나설 경우 오히려 경기가 위축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경기 위축 때 긴축 몰두하면 엇박자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 대처한 주요국의 재정 정책은 되새겨볼 만하다. 국회 예산정책처(예정처)는 지난달 말 펴낸 '2023년도 경제 현안 분석'에서 금융위기 이후 선진국들은 재정 확대로 불황에 대응하고, 경기 회복 국면에선 완만한 재정 긴축을 실시했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예정처는 "총량을 늘리지 않는 정부의 재정 운영 방향은 경기 둔화 시기에 재정 확장이 필요하다는 전통적 재정 운영 방식과 상충될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했다. 올해 경기 하강이 예상되는 만큼 긴축 재정 노선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조언이다.
윤석열 정부도 할 말은 있다. 문재인 정부에서 가파르게 상승한 국가채무비율을 제어하기 위해 긴축 재정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국가채무비율은 미래 세대가 갚아야 할 나랏빚이 늘어난다는 면에서 관리해야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확장 재정으로 질주했다.
특히 2020년 코로나19가 터지면서 재정을 적극 활용하려는 문재인 정부의 '큰 정부론'은 더욱 탄력 받았다. 확장 재정은 코로나19 극복에 기여했으나 후폭풍도 거셌다. 재정건전성 지표인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이 문재인 정부 집권 기간인 2018년 38.6%에서 2022년 49.7%까지 치솟은 게 대표적이다.
문재인 정부에서도 국가채무비율을 제어하려는 움직임은 있었다. 재정 관료 출신인 홍남기 전 경제부총리가 2019년 국가채무비율을 40%대 초반으로 유지하겠다고 나선 것. 하지만 문재인 전 대통령이 "40%대의 근거가 무엇이냐"고 질타하면서 당시 40%로 통용되던 국가채무비율 마지노선이 뚫렸다.
윤석열 정부가 경기 회복과 재정건전성을 모두 잡으려면 실용주의 노선을 택해야 한다는 주문이 나온다. 같은 보수 정권이면서 확장과 긴축 재정을 함께 쓴 이명박 정부는 되짚어 볼 사례다. 이명박 정부는 금융위기가 터진 2008년 전년 대비 10.6% 늘어난 2009년도 예산안을 수립했다. 문재인 정부 때보다 큰 증가폭이었다.
이어 2009년 당시로선 역대 최대인 28조4,000억 원의 추가경정예산(추경)을 편성했다. 이명박 정부는 경기가 반등하자 2010년 예산 증가율을 2.5%로 떨어뜨리는 등 곧바로 긴축 재정으로 전환했다.
정권 따라 출렁이는 재정 정책, 준칙 필요
정부 안팎에선 윤석열 정부의 재정 노선이 얼마나 유연한지 판단할 수 있는 척도로 추경 편성을 들고 있다. 추경 편성은 물가 자극 요인이라 당장 하긴 섣부르나, '쓸 땐 쓴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어서다.
중장기적으론 재정 정책이 정권에 따라 출렁이지 않는 장치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진보 아니면 보수로 나뉘어 중도가 자리 잡기 어려운 정치 지형처럼, 재정 정책 역시 진영에 따라 확장 대 긴축으로 대립하는 모습을 끊어내야 한다는 뜻이다.
이 지점에선 진보, 보수 간 접점이 있다. 문재인 정부, 윤석열 정부가 모두 동의한 재정준칙 수립이다. 두 정부는 단기 재정 정책인 이듬해 예산 증가율 또는 추경 편성 여부를 두고 입장이 다르나, 나랏빚 증가를 제어해야 한다는 대의에는 공감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문재인 정부, 윤석열 정부가 각각 설계한 재정준칙의 큰 골격도 비슷하다. 국가채무비율 60%를 상한선으로 두고 이를 웃돌 경우 재정을 강력하게 조이겠다는 점에서 닮았다.
국제통화기금(IMF) 등 국제사회 역시 한국의 재정준칙 수립을 지지하고 있어 법제화하기 좋은 조건이다. 다만 문재인 정부 시기에도 더불어민주당은 재정준칙 법안 처리에 미온적이었던 만큼 법 통과가 내년 4월 총선 이후로 밀릴 가능성이 있다.
강인수 숙명여대 경제학부 교수는 "재정건전성이 다른 주요국보다 낫긴 하지만 악화 속도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빨라 미리 관리할 필요가 있다"며 "나랏돈을 쓰더라도 특정 범위 내에서 허용하는 재정준칙을 수립해야 한다"고 말했다.
기재부 예산실장을 지낸 한 전직 관료는 "연구개발 예산을 예로 들면 특정 분야를 정부가 나서 키우겠다는 의지가 잘 보이지 않는다"며 "재정이 건전성을 유지하면서 경제 성장에 기여하기 위해선 꼭 필요한 분야에 대대적으로 투입하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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