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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북한이 식량 부족을 겪기 시작한 건 1980년대부터인 것으로 알려진다. 산악이 두드러지는 북한의 지형 특성상 식량 자급자족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영농법이 낙후한 데다 1990년대 이래 이상저온, 토지 산성화, 홍수 등이 겹치면서 식량 부족은 점점 심해졌다. 1995년엔 유례없는 대홍수가 닥쳐 1994~1995년 기간에만 무려 350만 명이 아사한 것으로 파악된다. 우리 정부와 민간의 대북 식량지원이 본격화 한 것도 그 시점이다.
▦ 남북관계는 1993년 3월 북한이 핵확산방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한 뒤 94년 9월 클린턴 행정부가 영변 핵시설 폭격까지 추진하는 과정에서 극도의 위기를 겪었다. 하지만 위기는 북·미가 1994년 10월 북핵 프로그램 동결을 골자로 한 ‘제네바 합의’를 이루며 극적인 유화국면에 접어들었다. 이후 남·북한과 미·중이 참여하는 4자회담이 추진되면서 우리 정부는 1995년 6월 쌀 3,000톤을 시작으로 그해에 총 15만 톤을 긴급 지원했다.
▦ 1995년부터 2010년까지 우리 정부의 대북 식량지원은 쌀 265만5,000톤, 옥수수 20만 톤 등 총 285만5,000톤에 달했다. 북한 핵개발 위기가 인도적 식량지원을 통한 유화국면으로 전환된 셈이 됐다. 다만 정부는 지원 식량이 북한 주민에게 제대로 전달되도록 분배 투명성 강화를 위해 노력했으며, 한글로 ‘쌀’, ‘40kg’, ‘대한민국’ 등 제공자를 표기하고, 우리 측 관계관의 분배현장 방문을 시도하기도 했다.
▦ 북한의 연쇄 미사일 도발 와중에 최근 들어 현지의 심각한 식량난 징후가 잇달아 전해지고 있다. 북핵 위기와 식량난이 겹쳤던 1995년 상황과 비슷하다. 그래도 당시엔 북한이 남한에 먼저 지원을 요구할 정도로 식량 확보에 적극적이었다. 반면 지금 북한은 아사자가 지방에 속출한다는 데도 유엔 세계식량계획(WFP) 등의 지원 제의를 되레 거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문재인 정부 식은 곤란하지만, 북한 주민에 대한 인도적 식량지원은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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