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차 능동방어장치 도입의 필요성
편집자주
한반도와 남중국해 등 주요국 전략자산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현장의 다양한 에피소드를 흥미진진하게 전달해 드립니다. 이일우 자주국방네트워크 사무국장이 격주 화요일 풍성한 무기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냉전 시대가 막을 내린 이후 전 세계에 불어 닥친 군비 축소 열풍 가운데 ‘전차’는 감축 1순위 무기였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나토) 최전선 국가이자 ‘전차강국’이었던 독일은 보유한 전차 대부분을 중고로 팔아 치웠고, 각각 수백 대씩의 전차를 보유해 다수의 기갑사단을 운용하던 유럽 국가들은 100~200대 안팎까지 전차를 감축하거나 아예 전차부대를 없애버리기까지 했다. 대규모 전면전 가능성이 사라지면서 무겁고 둔중하며 유지비도 많이 들어가는 전차를 대량으로 가지고 있을 이유가 없어져서다.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미국을 비롯한 유럽 각국에서는 지상군 인벤토리 중 전차를 대폭 감축하거나 아예 없애고, 기갑전력을 차륜형 경장갑차 중심으로 재편하는 현상이 유행했다. 이 시기 미군에는 대량의 ‘스트라이커’ 장갑차가 도입됐고, 유럽 기갑부대들도 전차 대신 차륜형 장갑차에 대포를 얹거나 기관총만 탑재한 모델들을 주력 장비로 도입했다. 이런 장갑차량들은 전차보다 유지비가 훨씬 저렴했고, 선박은 물론 항공기로도 수송이 가능해 평화유지군이나 저강도 분쟁 대응 임무에 대단히 유용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테러와의 전쟁 이후 '전차 무용론'
2000년대 들어 각국의 인식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테러와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다. 미국과 영국 등 유럽 각국은 이때까지 이라크·아프가니스탄에서의 치안 유지 작전을 ‘저강도 분쟁’으로 인식하고 험비 등 일반 전술차량에 소총탄 방어 능력 정도만 부여한 차량이나 스트라이커 장갑차와 같은 차륜형 장갑차를 주로 투입했다. 현지 치안을 위협하는 불법 무장 세력들은 기껏해야 소총이나 기관총 정도만 갖춰 소총탄 방어가 가능한 차륜형 장갑차로도 충분히 상대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방 각국의 경장갑차들은 탈레반이나 이슬람 저항세력이 RPG-7을 비롯한 다양한 보병 휴대용 대전차 무기와 급조폭발물(IED) 공격을 가하기 시작하자 곳곳에서 손실을 입었고, 막대한 희생자가 나왔다. 상황이 악화되자 각국은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전장에 경장갑차보다 훨씬 더 강력한 장갑 방호력을 갖춘 전차를 투입했지만, 이 전차들도 보병 휴대용 대전차 무기에 제압당하기 일쑤였다.
보병이 전차를 압도하는 이러한 상황은 2000년대 이라크·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진 테러와의 전쟁은 물론, 이후 예멘 내전, 시리아 북부에서 진행된 튀르키예의 IS 소탕작전 등에서도 나타났다. 테러와의 전쟁에서 미국과 영국은 세계 최강의 방호력을 갖췄다는 M1에이브람스나 챌린저2 전차를, 예멘 내전에서 사우디아라비아는 M60과 M1A1 전차를, 시리아 IS 소탕작전에서 튀르키예는 레오파르트2 전차를 각각 투입했다. 하지만 서방을 대표한다는 이들 전차는 보병들이 날린 대전차 무기에 너무도 쉽게 파괴당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세계 각국에서는 '전차 무용론'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얇은 장갑의 경장갑차든 중장갑의 전차든 대전차 무기 한방에 파괴되는 것은 마찬가지이니 굳이 장갑차보다 비싼 전차를 굴릴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전쟁은 이런 전차 무용론을 단숨에 가라앉힌 전환점이 됐다. 드넓은 대평원 지역은 물론 빌딩숲에서 벌어지는 시가전에서도 전차가 위력을 발휘하면서다. 어지간한 총탄은 가볍게 튕겨내는 전차는 보병들의 든든한 엄호 수단이었고, 강력한 주포와 여러 정의 탑재 기관총을 이용해 ‘움직이는 포대(砲臺)’로서의 역할도 톡톡히 해냈다. 러시아군은 운용 병력들의 전문성 부족으로 인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전차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지만, 우크라이나군은 노후 전차와 러시아군으로부터 노획한 전차들을 이용해 동부전선 각지에서 고속 기동전을 펼치며 러시아군을 혼비백산하게 만들었다.
우크라이나 기갑부대, 전차 무용담 살려내
특히 지난해 가을, 도네츠크주 리만에서 벌어진 전투 당시 우크라이나군은 소량의 전차와 다수의 장갑차로 구성된 수개의 기계화 여단을 투입해 러시아군의 최정예 제90근위전차사단을 비롯한 군단급 기갑부대를 물리쳤다. 고작 나흘 만에 이들을 50㎞ 이상 밀어내고 수백 대의 기갑차량을 노획하는 대전과를 거둔 것이다.
이 전쟁에서 전차는 공격력과 방어력, 기동력을 조화롭게 갖춘 무기체계로 현대 지상전에서 가장 위력적인 무기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그러나 같은 전차라도 어떻게 운용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점도 우크라이나군과 러시아군의 사례를 통해 증명됐다. 양측은 지난 1년여간의 전쟁을 통해 현대전에서 전차의 가장 큰 적은 전차가 아니라 미사일·로켓과 같은 대전차 무기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 교훈에 따라 적의 대전차 무기로부터 전차를 효과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다양한 수단들을 고안해 적용 중이다. 우크라이나군은 전차 포탑과 차체 사방에 폭발반응장갑을 덕지덕지 붙이는 방식으로 생존성 강화를 꾀하고 있다. 전차의 가장 취약한 부분인 포탑 윗부분을 공격하는 ‘탑어택’ 방식의 미국산 ‘재블린’ 대전차 미사일에 많은 전차를 잃은 러시아군은 포탑 위에 강철로 된 지붕을 만들어 씌우는 등 조치를 취하고 있다.
대전차 무기 빈틈없이 막아내는 APS
그러나 폭발반응장갑은 피탄 시 전차 주변의 보병이 죽거나 다칠 수 있고, 강철 지붕은 포탑의 움직임과 승무원들의 시야를 크게 제한하므로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우크라이나 전쟁을 지켜보는 세계 각국은 능동방어장치(APS: Active Protection System) 도입을 서두르고 있다. APS는 전차 사방에 소형 레이더를 달고, 이 레이더와 소형 요격탄을 결합한 시스템이다. 레이더가 전차 주변에서 전차를 향해 접근하는 고속 비행체를 탐지하면 곧바로 요격탄을 발사해 격추하는 개념이다. 보병이 휴대하는 대전차 무기는 대부분 속도가 느리다는 점에 착안해 고안된 것인데, 이러한 APS를 가장 먼저 대량 보급한 이스라엘군은 이 시스템을 이용해 실전에서 수많은 생명을 살렸다. 필자는 몇 해 전 이스라엘군 초청으로 현지에서 APS 시스템이 탑재된 전차의 실전 기록 영상과 이 APS의 운용 시현을 직접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대전차 무기를 아무리 쏴 대도 이를 모두 막아내는 ’금강불괴‘와 같은 전차가 주포와 기관총을 난사하며 적진을 향해 돌격한다면 아군은 사기충천할 것이고, 적군은 공포에 휩싸여 전의를 상실하리란 생각이 들었다.
보병 분대마다 2개의 대전차 무기를 갖추는 북한군과 맞서는 우리 군 기갑차량들은 이러한 APS 보급이 그 어느 나라보다 절실하다. 우리는 2,300여 대의 전차와 3,000대 가까운 장갑차를 보유한 기갑대국이며 이미 10년 전에 자체 기술로 APS 개발에 성공한 나라다. 그러나 단 1대의 기갑차량에도 APS를 장착하지 않은 이상한 나라이기도 하다. 당장 전차 승무원들의 숫자만 합쳐도 9,000명이 넘고, 장갑차에 탑승해 임무를 수행하는 승무원·기계화 보병의 규모는 3만4,000여 명에 달하는데, 북한의 대전차 무기로부터 이들을 지켜줄 APS는 단 1대도 보급돼 있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군 고위층의 인식 부족, 그리고 세트당 20억 원에 달하는 비용 때문이다.
최신예 K2 전차 1대 가격이 100억 원에 못 미치는데 전차의 ’옵션‘ 장비에 불과한 APS가 20억 원이면 비싸게 느껴질 수 있다. 2,300여 대의 전차와 3,000대 가까운 장갑차에 모두 APS를 장착할 경우, 그 비용은 단순 계산으로도 12조 원에 달한다. 이는 2023년 우리 군의 전체 무기 구매 예산(방위력 개선비)의 70%에 달하는 엄청난 액수다.
분명 12조 원은 적은 돈이 아니다. 그러나 병력 자원이 그 어느 때보다 귀해진 시대에 이 돈으로 4만3,000명이 넘는 장병의 생명을 확실히 보호하고, 우리 기갑전력의 위력을 극대화시켜 적을 확실하게 압도할 수 있다면 비싸다고만 할 수 없다. 부디 우리 군 당국이 우크라이나 전쟁을 타산지석 삼아 기갑차량 방호 문제를 보다 진지하게 고민해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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