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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VB 르포] 자산 276조 은행이 44시간 만에.... 직원들도 몰랐던 '초고속 파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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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VB 르포] 자산 276조 은행이 44시간 만에.... 직원들도 몰랐던 '초고속 파산'

입력
2023.03.13 04:30
수정
2023.03.14 18:18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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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 돈 묶인 실리콘밸리 스타트업들
임금체불 등 가능성... 줄도산 우려

11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 샌타클래라의 실리콘밸리은행(SVB) 본사. 입장을 제지당한 시민들이 본사 건물 밖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하고 있다. 실리콘밸리=이서희 특파원

11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 샌타클래라의 실리콘밸리은행(SVB) 본사. 입장을 제지당한 시민들이 본사 건물 밖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하고 있다. 실리콘밸리=이서희 특파원


11일(현지시간) 오전 찾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타클래라의 실리콘밸리은행(SVB) 본사. 토요일이었지만 하루 전 난데없이 전해진 은행 파산 소식에 사람들의 발길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굳게 닫힌 건물 입구에는 파산 사실을 알리는 보도자료만 붙어 있었다. 내용을 자세히 보기 위해 다가서자 입구를 지키던 보안요원이 "가까이 가지 말라"며 팔을 뻗어 저지했다.

실리콘밸리은행 소개. 송정근 기자

실리콘밸리은행 소개. 송정근 기자


미국 16위 대형은행, 하루아침에 몰락

멀찌감치 떨어져 건물 사진을 찍고 있으려니, 한 남성이 다가와 "나는 안 나오게 찍어 달라"고 말했다. SVB 직원이라고 스스로의 신분을 밝힌 그는 "나도 뉴스를 보고 파산 소식을 접했다"며 "정말 하루아침에 벌어진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뭐라도 들을 수 있을까 싶어 여기에 왔다"며 답답해했다.

망연자실한 이 남성과 달리, 인근에 산다는 한 여성은 건물을 배경 삼아 '인증샷'을 찍었다. 그는 "자주 지나가던 은행인데 곧 없어진다고 해서 보러 왔다"고 말했다. SVB는 보통 은행과 달리 개인이 아닌 벤처기업과 주로 거래하는 은행이라 일반인들이 파산을 쉽게 체감하지는 못하지만, 이 지역 터줏대감(미국 내 은행 규모 16위)이었던 은행의 파산은 지역 사회에도 충격이다.

지난 40년간 벤처기업에 자금을 대며 실리콘밸리 생태계를 지탱해 온 SVB가 무너지는 데는 단 44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직원조차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냐"고 물을 만큼 갑자기 닥친 은행의 몰락에 실리콘밸리가 혼돈에 빠졌다.

실리콘밸리에선 투자사와 스타트업의 절반 이상이 SVB와 거래를 맺고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간접 여파까지 합치면 사실상 실리콘밸리 전체가 영향권에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빅테크(주요 기술기업)의 해고 쓰나미가 거쳐간 실리콘밸리에, 이제 돈줄 끊긴 스타트업들의 연쇄 도산 가능성까지 언급되는 중이다.

11일(현지시간) 오전 미국 캘리포니아 샌타클래라의 실리콘밸리은행(SVB) 본사. 굳게 닫힌 입구에 파산을 알리는 보도자료가 붙어 있다. 실리콘밸리=이서희 특파원

11일(현지시간) 오전 미국 캘리포니아 샌타클래라의 실리콘밸리은행(SVB) 본사. 굳게 닫힌 입구에 파산을 알리는 보도자료가 붙어 있다. 실리콘밸리=이서희 특파원


실리콘밸리 절반이 이 은행과 거래

스타트업들이 SVB 파산의 가장 큰 피해자로 지목된 이유는 SVB와 스타트업 생태계의 깊은 관계 때문이다. 지난해 말 기준 총 예금액이 1,754억 달러(약 232조5,000억 원)인 SVB의 주요 고객은 실리콘밸리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기술 스타트업, 투자사, 사모펀드 회사 등이다. SVB는 이들의 예금을 예치하고, 스타트업에 특화한 대출 상품 등을 통해 돈을 빌려주기도 했다.

미국 테크·헬스케어 스타트업 가운데 44%가 SVB를 이용한다. 실리콘밸리에서 10년 넘게 스타트업을 이끌고 있는 한 한국인 대표는 "SVB는 스타트업에 대한 대출 문턱이 상대적으로 낮은 것으로 유명하다"며 "주변 한인 설립 스타트업 중에선 SVB와 거래를 안 하는 곳을 찾기 어려울 정도"라고 했다.

SVB 고객들은 25만 달러(3억3,000만 원)까지만 예금 보호를 받을 수 있다. 이를 초과하는 금액을 돌려받는 데는 1년 이상이 걸릴 수도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예금보호 한도를 초과한 금액의 인출을 보장하는 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고객이 전체의 90%"라고 추정했다. 한 비영리단체는 SVB에 25만 달러 이상 예금을 보유한 벤처기업을 3만7,000개 이상으로 추산했다.

SVB의 초고속 몰락. 송정근 기자

SVB의 초고속 몰락. 송정근 기자


스타트업은 당장 급여 지급부터 걱정

가뜩이나 경기 침체로 투자 유치가 어려워진 상황에서 통장에 넣어둔 돈까지 묶이면서, 상당수 스타트업들은 생존 자체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실리콘밸리 유명 벤처투자사인 와이 컴비네이터(YC)가 10일 긴급 조사한 결과, 이 회사 투자를 받고 있는 약 3,000곳의 스타트업 중 100곳 이상이 "SVB 예금 인출이 불가능하면 당장 직원 급여 지급이 어렵다"고 답했다고 한다. 캘리포니아주에선 임금 체불 시 물어야 하는 벌금이 전체 원천징수 금액의 일정 비율까지 계속 늘어난다. YC는 "임금 지급이 어려워지면 무급 휴직이나 직장폐쇄에 돌입할 수밖에 없고, 10만 개 이상 일자리에 즉각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내다봤다.

SVB에서 대출받은 스타트업의 문제는 더 심각하다. 한 스타트업 관계자는 "SVB에서 돈을 빌린 스타트업은 당장 쓸 현금을 다른 데서 구해야 할 뿐 아니라 상환 가능성까지 대비해야 한다"며 "만약 전액 일시 상환을 요구할 경우 파산밖에는 방법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파산 여파 전 세계에 미칠 수도

스타트업 업계에선 SVB가 캐나다, 중국, 인도 등에도 지사를 두고 있어 여파가 미국에만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한다. 전 세계 스타트업 생태계 붕괴로 이어질 것이란 극단적인 예상까지 나오면서 미국 정부는 긴급히 대응 마련에 착수했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미 규제당국은 예금 보호가 안 되는 금액도 일부 조기 지급 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다. 25만 달러 초과분 중 30~50%를 먼저 지급해 피해를 줄이겠다는 것이다.

한편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는 10일 자신이 SVB를 인수할 수 있다는 일각의 예측에 대해 "그 생각에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 했다. 11일 기준 머스크의 총 자산은 약 1,650억 달러(218조 원)다.

실리콘밸리= 이서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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