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유일 학폭 피해 치유 전문기관인데
붕괴 위험 등 시설 노후 심각, 운영 차질
정원마저 30→10명 축소... 대체지 난항
"피해자 좋은 공간 누릴 권리, 지원 절실"
흉터는 가렵고, 생리통으로 배는 끊어질 듯 아프고. 그 순간 그런 생각이 들더라. 약국은 9시에 열고, 한강은 20분만 걸으면 된다. 그럼 다 편해질 거야. 더는 가렵지 않을 거야.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주인공은 학교폭력(학폭) 피해의 질긴 고리를 이렇게 묘사했다. 차라리 죽음을 택하고 싶을 만큼 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학폭의 심각성에 대중은 크게 공감했다. 마침 정순신 변호사 아들 사태까지 터지며 드라마와 현실의 묘한 이어짐에 어느 때보다 학폭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여론은 분노했고, 정부는 학폭 가해자 조치 사항을 대학입시에 반영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등 보완책 마련에 분주하다. 처벌과 단죄가 통쾌하기는 하나 간과하는 지점이 있다. 이번에도, 이전에도 학폭 대책의 초점은 가해자에게 맞춰져 있다.
일상을 폭력에 저당잡힌 피해자는 늘 후순위다. 이런 무관심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현주소가 국내 유일의 학폭 치유 전문기관 ‘해맑음센터’다. 괴롭힘에 지쳐 등교조차 버거운 청소년들이 마지막으로 문을 두드리는 기숙형 대안학교, 이곳은 지금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다.
학폭 피해자 355명 보듬은, 하나뿐인 공간
새 학기가 막 시작된 8일, 서울에서 차로 2시간 30분을 달려 대전에 도착했다. 다시 구불구불한 논밭 길을 따라 한참을 더 들어가니 유성구 대금로에 있는 해맑음센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희망 가득한 이름과 달리 센터는 성한 곳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콘크리트 조각이 곳곳에 나뒹굴었고, 기숙사와 강당엔 진입 금지 안내문이 적힌 테이프가 둘러져 있었다. 임시 기숙사로 사용하는 교사 관사에도 지난해 여름 장마에 뒷동산이 무너져 토사가 쏟아진 흔적이 뚜렷했다. 또 부서진 교실 바닥 나무판자엔 땜질 자국이 선명했고, 벽 곳곳엔 새까맣게 곰팡이가 피어있었다.
센터는 2013년 문을 열었다. 교육부 지정과 시ㆍ도교육청의 위탁을 받아 학교폭력피해자가족협의회가 무료로 운영하고 있다. 출석도 인정된다. 지난 10년간 학폭 피해 학생 335명이 짧게는 2주에서 길게는 1년간 이곳을 거쳐갔다. 조정실 센터장은 “괴롭힘을 당한 아이들은 친구와 어울린 추억이 적어 놀이동산, 해외탐방 등 다양한 체험활동과 치유 프로그램을 집중적으로 선보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학부모들이 참여하는 가족상담도 센터가 하는 일이다.
물론 시ㆍ도교육청에서 운영하는 가정형 ‘위(Wee)센터’와 ‘Wee 스쿨’ 등 학폭 피해 학생이 갈 수 있는 다른 기숙시설도 있다. 다만 위기에 처한 청소년들을 전부 받아 학폭 피해자들은 가해 성향의 학생과 마주칠까 봐 입소를 꺼릴 때가 많다고 한다. 피해 학생들끼리 어울리며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은 센터뿐이다.
효과는 이미 입증됐다. 2018~2021년 센터를 다녀간 학생들 중 96.1%가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2021년 수료생 대상 설문조사(5점 만점)에서는 ‘센터 생활 후 나에게 긍정적 변화가 생겼다’는 항목의 평균 답변 값이 4.42점으로 나왔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심한 폭행에 시달려 자녀를 1년 정도 센터에 보냈다는 A(47)씨는 “바닥까지 떨어진 아이의 자신감을 센터에서 회복했다”며 “나도 덩달아 공황장애를 극복하고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고 말했다. A씨는 센터를 “우리 가족에게 ‘마지막 동아줄’”이라고까지 표현했다.
"성한 곳이 없어요"... 존폐 위기
센터는 개학 시기가 일반 학교보다 한 달 늦다. 학기 초 학폭 피해를 당한 학생들을 받기 위해서다. 올해는 20일 개학한다. 그런데 30명인 정원이 10명으로 대폭 줄었다. 1963년 지어진 기숙사 시설이 노후화로 폐쇄된 탓에 수용 공간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기숙사는 2019년 정밀안전점검 C등급에 이어 지난해 9월 결국 붕괴 위험 진단을 받았다. 학생들은 교사 관사에 매트리스를 깔고 생활했다. 기숙사와 연결된 강당도 문을 닫아 한겨울에도 추운 운동장이나 좁은 교실에서 체육활동을 했다. 올해는 임시로 서고를 기숙사로 급조해 쓰기로 했다.
건물을 헐고 다시 지으면 될 일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일대가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 있어 불가능하다. 교육부 지원으로 수리를 하자니, 수년째 8억 원으로 동결된 연간 예산은 교직원 11명 임금을 주기도 빠듯하다. 관할 대전교육청 등의 도움을 받아 땜질 수리를 하는 게 고작이다. 이날도 옥상에서는 방수 페인트를 칠하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낡은 교육 공간은 학생들의 자존감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김서영 교사는 “‘공간이 곧 치유’라는 말도 있듯 피해자가 더 좋은 환경에서 지내야 하는데 반대가 됐다”며 “입소를 하려고 센터를 찾았다가도 건물을 둘러보고 발길을 돌리는 학부모가 5명에 4명꼴”이라고 한숨을 쉬었다.
"더 많이 치유할 수 있게..." 지원 절실
대체부지 확보 역시 쉽지 않다. 교육부는 지난해 9월 각 시ㆍ도교육청을 통해 부지 공모를 받아 지난달 3곳을 최종 후보로 선정했다. 그러나 센터 측은 난색을 표한다. 모두 폐교 부지로 시설이 오래된 데다 접근성은 더 나쁘다. 센터 관계자는 “전국 각지에서 온 학생들이 주말에 집에 갔다 와야 하고 강사도 모집해야 하는데 장점이 없다면 굳이 옮겨야 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일단 교육부는 이달 안에 선정위원회를 열어 후보지 적합성을 검토할 계획이지만, 이전 완료 시점 등 정해진 건 없다. 교육부 관계자는 “시ㆍ도교육청들이 추가 시설 유치를 부담스러워해 협조를 구하는 게 여의치 않다”고 털어놨다. 지금 센터의 사용 계약도 다음 달 끝난다. 관할 대전교육청이 새 부지 선정 때까지 말미를 주기로 해 숨통만 잠시 트인 정도다.
센터와 피해 학부모들은 정부와 지자체가 좀 더 긴 안목에서 지원에 나섰으면 하는 바람이다. 기왕이면 교통편이 좋고, 각종 생활 기반도 갖춘 수도권 부지가 제공돼 폭력에 신음하는 학생들을 한 명이라도 더 치유해 주기를 원한다.
“피해자는 더 좋은 시설을 누릴 권리가 있습니다.”
이주호 교육부 장관은 이달 중 센터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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