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7 골다 메이어
유신정권은 이스라엘을 한국이 지향해야 할 국가적 모델로 상정해 청소년 등 국민의식화 교육에 적극 활용했다. 잇단 중동전쟁에서의 승리와 시오니즘적 애국심, 집단농장 키부츠의 자발적 근면성 등이 자주국방과 경제개발·새마을운동 모델로 이상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인이 점차 팔레스타인의 프리즘을 통해 이스라엘을 보기 시작한 것도, 87년 민주항쟁을 기점으로 한 정치 민주화 이후였다.
골다 메이어(Golda Meir, 1898~1978)는 원조 ‘철의 여인(The Iron Lady)’이라고 불린 이스라엘 최초 유일 여성 총리다. 1948년 건국 선언문에 서명한 24인 중 1명인 그는 초대 내각 노동·외교 장관을 거쳐 1969년 3월 17일 총리에 취임했고, 1974년 6월 자진 사퇴할 때까지 시오니즘 정치의 한 전범을 구축했다.
1972년 독일 뮌헨 올림픽에서 팔레스타인 테러단체가 이스라엘 선수단 11명을 학살(‘검은 9월단 사건’)하자 그는 모사드를 급파해 테러리스트 전원을 사살하게 했고, 1973년 10월 이집트-시리아 주축의 아랍동맹군과 벌인 ‘욤키푸르 전쟁(제4차 중동전쟁)’에서도 측근들의 선제공격 제안을 거부해 막대한 인명·재산 피해를 감수하면서 ‘피침략국’이라는 도덕적 우위를 챙기며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가 ‘이스라엘 정신의 정수’로, 시몬 페레스 이스라엘 전 총리가 ‘굳건한 암사자(stalwart lioness)’로 평가한 근거는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그는 ‘지금도 태어나고 있을 수많은 아랍 아기들을 생각하면 잠이 안 온다’고 말한 적이 있고, 팔레스타인 국가의 역사적 실체를 부정하며 “우리가 팔레스타인을 파괴하고 사람들을 내쫓았다는 건 어불성설”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1960년대 초 발병한 악성림프종으로 총리 재임 중에도 방사선·화학 치료를 받아야 했던 그는 정계 은퇴 전까지 자신의 투병 사실을 숨겼다. 그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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