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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는 동은이처럼···"엄청나지"

입력
2023.03.15 18: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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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작 '더 글로리' 복수가 통쾌한 이유
피해자가 이성적 대처로 상황 장악
현실과 다르지만, 드라마의 힘 발휘되길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더 글로리'에서 학교 폭력 피해자인 동은 역을 맡은 송혜교. 넷플릭스 제공

'더 글로리'에서 학교 폭력 피해자인 동은 역을 맡은 송혜교. 넷플릭스 제공

※이 칼럼에는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증거 있어? 증거 있냐고.” 불안한 표정의 연진에게 동은은 이렇게 응수한다. “엄청나지.” 그때 동은 역의 송혜교가 짓는 경멸적인 웃음은 강렬했다. 복수의 쾌감이 진하게 전해졌다. 이 장면은 학교폭력 피해자인 동은의 복수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더 글로리’ 파트2의 하이라이트로 꼽힐 만했다.

드라마 후반부 복수가 완료될 때쯤 동은은 자신을 취조하는 형사에게 득의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이런 말도 한다. “그게 불법인가요?” 동은의 복수는 그랬다. 치밀한 계산으로 자신은 피 한 방울 묻히지 않은 채 가해자의 손으로 가해자를 처단한다. 공권력의 외면으로 사적 복수에 나서야 했던 그는 공권력마저 복수의 도구로 활용한다. 동은의 망나니 칼이 되겠다고 했던 조력자 주여정도 엄마에게 다짐한다. 복수를 돕더라도 안 들킬 거라고.

그러니까 '더 글로리'의 복수는 스마트했다. 동은은 복수의 광기에 빠지지 않은 채 침착하고 냉철한 이성으로 상황을 장악해 합법적인 모양새로 당한 대로 되갚는다. 연진에겐 가족의 배신감을 느끼게 하고 억울함까지 안겼다. 심지어 최악 빌런인 엄마에게도 자신이 당했던 ‘핏줄만의 권리’란 쓴맛을 그대로 되갚으며 정신병원에 집어넣는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팃포탯(tit for tat) 전략가처럼. 집착과 광기로 허우적대는 이들은 가해자들이다. 동은의 계산과 심리전에 조종돼 가해자 간의 폭로와 배신으로 스스로 덫에 빠진다.

동은의 복수극이 통쾌했던 것은 ‘피해자의 설계로 가해자들이 파멸한다’는 잘 짜인 플롯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아마도 현실은 정반대라는 데서 연유할지 모르겠다. 드라마 밖에선 대개 가해자들이 더 냉정하고 계산적이며 법망을 잘 피하고 증거를 없애는 데도 능수능란하다. 연대도 가해자 쪽이 더 단단하다. 배가 완전히 침몰하기 전까지 웬만해선 가해자 간의 담합과 묵인은 흔들리지 않는다. 내부 고발자가 나오더라도 되레 왕따당하기 십상이다.

반면 피해자들의 경우 이성적인 대응이 쉽지 않다. 억울함과 원한, 분노 등으로 쉽게 격정에 휘말리기 마련이다. 공권력 대신 사적인 복수를 시도했다가는 더 깊은 늪에 빠진다. 복수가 복수를 불러 악순환에 빠지기 십상이다. ‘햄릿’을 비롯해 고전 드라마의 복수극들은 그래서 비극이었다. 불합리하고 모순적인 현실을 반영했던 셈이다.

이에 비춰 결국 ‘더 글로리’의 복수극이 드라마에서나 실현되는 판타지라고 폄하하려는 게 아니다. 현실에서 이루기 힘든 꿈과 욕망을 실현해 대리만족을 체험하게 하는 게 현대 드라마의 중요한 기능이라면 ‘더 글로리’는 이를 아주 통쾌하게 해냈다. 더군다나 드라마가 판타지의 장막을 찢고 나와 현실을 각성시키는 힘을 발휘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더 글로리’가 학교폭력 문제를 부각시켜 동남아 일부 국가에선 실제 학폭 추방 운동도 벌어지고 있다. 국가수사본부장에 임명됐던 정순신 변호사가 아들 학폭 문제로 하루 만에 낙마한 데도 ‘더 글로리’ 영향이 컸다.

그러하니, 학교폭력이나 성폭력, 사내폭력 등으로 고통받는 연약한 피해자들에게 당부하고 싶다. ‘복수는 동은이처럼’ 하라고. ①분노를 절제하는 등 격정에 휘둘리지 말고 ②냉철한 이성으로 해법을 찾아가면서 ③조력자를 하나씩 늘려 가야 한다고. 그것이 조금이나마 피해자가 유리한 환경을 만드는 방법일 터다. 억울하다고 울부짖는 피해자보다, 당당하고 침착한 피해자를 볼 때 가해자들이 불안에 떨 게 분명하다. 증거를 따지면, “엄청나지”라며 경멸의 웃음을 한 방 날려주는 것도 좋겠다.

송용창 뉴스2부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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