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우리나라에는 서로 다른 이름을 가진 약 4천 종의 식물이 자랍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우리나라 풀, 꽃, 나무 이름들에 얽힌 사연과 기록, 연구사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들로 엮을 계획입니다.
챗GPT에 우리나라의 봄을 대표하는 꽃이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매화라는 단수의 꽃을 지목해서 나름의 논리로 설명을 붙인 답문에 수긍이 갔다. '겨울과 봄 사이에 피어 봄소식을 전해주며, 맑은 향기와 신선의 운치로 순결과 절개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어 널리 심고 가꾸는 식물'이라는 내용이었다. 얼핏 개나리나 진달래라는 답을 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인공지능(AI)의 판단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완연한 봄이 된 이맘때 각종 SNS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꽃도 매화이니 말이다.
눈을 맞고 피어 있는 설중매(雪中梅) 이미지 때문인지 매화나무를 추위에 강한 식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꽃이 일찍 피어 이른 봄 내리는 눈을 맞은 꽃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생긴 오해다. 실제 매화나무의 원산지는 대만과 중국 동남부의 따뜻한 지역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순천 선암사와 구례 화엄사 등 남부지역의 사찰과 고택에 오래된 매화나무가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서울 창덕궁의 '만첩홍매'처럼 야생성이 강하거나 강릉 오죽헌의 '오죽매'처럼 살구와 교잡한 매화나무는 가지가 굵고 단단하여 서울 이북에서도 추위에 견디며 잘 자라기도 한다. 덕수궁 석어당 앞에 살구나무를 심은 것에 혹시 다른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추위에 약한 매화 대신 매우 잘 심은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나라에 매화나무가 들어온 시기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비롯한 몇 가지 기록을 근거로 삼국시대 이전으로 보는 견해가 타당해 보인다. 일본에는 백제의 왕인(王仁)이 약용으로 가져가 처음 심었다는 설과 중국에서 바로 전래했다는 설 등이 분분하지만 근래까지 우리나라와 중국으로부터 많은 자원을 가져간 것은 틀림없다.
서양에서는 매화를 꽃나무로 가꾸고 즐긴다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오직 한중일 세 나라에서만 매화를 완상하는 것 같다. 일본에서는 벚꽃이 피기 전까지 많은 곳에서 매화축제(우메마츠리)를 열고 있다. 일본인들의 매화에 대한 남다른 애착과 욕심 때문인지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다양하고 오래된 매화나무들을 수탈하여 반출했다는 기록이 많다.
일본 미야기현 마쓰시마에 용의 형상으로 옆으로 자라서 '와룡매(臥龍梅)'라는 별칭이 붙은 지역 명물 매화나무가 있다. 일본의 천연기념물로도 지정되어 있는 이 매화나무들은 임진왜란 중인 1593년 창덕궁 선정전 앞에서 훔쳐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후계목들을 반환형식으로 들여온 적이 있다. 1991년 재일교포 한 분의 노력으로 들여온 두 그루는 현재 수원농생명과학고 교정에, 1999년 미야기현 소재 사찰에서 온 두 그루는 서울 안중근의사기념관에 각각 심겨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값싸게 팔려갈 뻔한 전남 진도의 운림산방의 일지매(一枝梅)를 지킨 사연에서 매화 향기 같은 잔향이 느껴진다. 경복궁 교태전 후원 아미산에 심었다는 그 매화나무는 또 어디 간 것일까?
코로나19로 그동안 열리지 못했던 남쪽지방 매화축제에 역대 최대 인파가 몰렸다고 한다. 오랜 기간 답답했던 일상을 벗어나 꽃구경을 위해 어울려 즐기는 것만으로도 목적을 이룬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매화는 어우러져 핀 경관을 감상하는 것 이상의 것을 얻을 수 있는 꽃이다.
매화는 꽃 색깔에 따라, 혹은 근연종과의 교잡여부나 기원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구분한다. 감상하는 방법도 처음 피는 매화를 감상하는 '심매(尋梅)', 만개한 매화를 찾아 즐기는 '관매(觀梅)' 등 다양하다. 피어서 아름답지 않은 꽃은 없지만 감추어진 것까지 살펴 제대로 감상하려면 약간의 공부가 필요하다. 매화는 그런 꽃이다.
※ 매화나무의 정식명칭은 매실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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