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대구 고속도로서 사망 여대생
성폭행 정황 간과... 주범 스리랑카인 15년 만에 기소
국내선 피해자 속옷서 발견된 DNA 일치에도 무죄
스리랑카서 대법원 최종 판단 앞둬
25년 전 발생한 '대구 여대생 성폭행 사망 사건'의 주범이 마지막으로 법의 심판을 받게 됐습니다. 법무부가 지난 14일 '대구 여대생 성폭행 사망 사건' 용의자 K(57)씨가 스리랑카 검찰의 상고로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있다고 밝힌 건데요. 유족의 끈질긴 노력에도 국내에서는 무죄가 확정돼 처벌할 수 없었던 만큼, 반전을 이끌어 낼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립니다.
사건 초기 부실수사로 꽤 많은 시간이 흐른 뒤 재수사가 이뤄져 '공소시효' 만료로 결실을 맺지 못했던 터라, 이번에는 유족의 한을 풀어줬으면 좋겠습니다만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그때 그 뉴스'로 살펴봤습니다.
사건은 1998년 10월 17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날 오전 5시 10분쯤 정모(당시 18세ㆍ계명대 1년)씨가 대구 달서구 옛 구마고속도로(현 중부내륙고속도로)에서 25톤 트럭에 치여 숨졌습니다. 정씨가 학교 축제기간이었던 전날 밤 10시 30분쯤 만취한 친구를 집에 데려다주려 학교를 나선 지 약 7시간 만에 벌어진 '비극'이었죠. 당시 정씨의 시신은 겉옷만 걸친 상태였고, 다음 날 사고 현장에서 30여 m 떨어진 곳에서 유족들이 정씨의 속옷을 발견하는 등 성폭행이 의심되는 상황이었지만, 경찰은 제대로 수사하지 않은 채 그해 12월 단순 교통사고로 결론 내렸습니다.
그런데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이듬해 1월 "정씨가 차량으로 인해 깔아뭉개진 것은 사실이나 이로 인한 출혈이 없기에 교통사고 당시 이미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는 부검 결과를 내놓습니다. 또 고속도로를 횡단한 점, 집 반대 방향으로 가려 했던 점, 혈중알코올농도가 0.13%로서 운동에 크게 지장을 받지 않을 정도인 점 등을 근거로 "흔한 보행자 교통사고와는 달리 사고 전 신변에 중대한 위협을 받아 매우 긴박한 상황임을 암시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경찰은 3월 국과수에 속옷 감정을 의뢰해 속옷에서 정액을 검출했지만, 신원 확인에는 실패합니다. 유족도 여러 차례 검찰과 경찰, 청와대 등에 탄원하며 재수사를 촉구했지만, 큰 소득이 없었습니다.
"초동 수사 부실... 'DNA 일치' 스리랑카인 13년 만에 범인 지목돼"
그렇게 영구 미제로 남을 뻔했던 사건은 스리랑카인 K씨가 2011년 미성년자 성매매 사건으로 입건되면서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합니다. 이때 K씨에게서 채취한 DNA가 정씨의 속옷에서 발견된 DNA와 일치한다는 감정결과가 나온 겁니다. 그동안 유전자 분석기술 등의 발전으로 정씨 속옷서 발견된 정액에서 DNA를 검출하고, 2010년 일명 DNA법(DNA 신원확인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이 시행된 덕분입니다.
재수사에 착수한 대구지검은 마침내 2013년 9월 4일 정씨를 집단 성폭행한 혐의(특수강도강간)로 스리랑카인 K(당시 46세)씨를 구속기소하고 스리랑카로 출국한 공범 2명을 같은 혐의로 기소중지합니다. 이미 특수강간죄의 공소시효(10년)가 지난 상태여서, 검찰이 고심 끝에 숨진 정씨의 학생증과 책 3권, 현금 3,000원가량을 훔친 특수강도죄를 추가해 특수강도강간 혐의(공소시효 15년)라는 우회로를 택한 겁니다. 범행 당시 특수강도강간은 공소시효가 15년으로 2013년 10월 16일로 만료되지만, 2010년 관련 법 개정으로 DNA가 확보된 성범죄는 10년 연장돼 25년이 늘어나 가능했던 일입니다.
검찰 조사결과, K씨 등은 귀가 중이던 정씨를 자전거에 태워 구마고속도로 아래 굴다리 근처에서 차례로 성폭행했습니다. 사건 당시 산업연수생이던 공범들이 각각 2003년과 2005년 귀국한 것과 달리 K씨는 한국인 여성과 결혼, 한국에서 개인사업을 해 온 사실도 밝혀졌죠. 당시 박근혜 대통령이 2014년 신년기자회견 때 "유족의 억울함을 풀어 달라"고 발언하며 관심을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기대와 달리 재판에서 다시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2014년 5월 30일 대구지법이 증거부족을 이유로 K씨에게 무죄를 선고(당시 검찰은 무기징역 구형)해서죠. 재판부는 공소시효 15년인 특수강도강간 혐의에 대해 "검사가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수 있을 정도로 입증되지 않는다"고 판시했습니다. 특수강도강간은 강도가 성폭행을 한 것인데, K씨 등의 강도 짓 여부가 확실치 않다는 취지였죠. K씨는 성폭행을 뒷받침하는 DNA 증거조차 재감정을 요구하며 "현장에 간 사실조차 없다"고 범행을 부인했다고 해요.
법원 "스리랑카인 성폭행 가능성에도 '증거부족' 무죄"
검찰이 K씨 등이 강도 짓을 하면서 성폭행했다고 제시한 증거는 스리랑카로 되돌아간 공범 중 1명이 지인에게 했다는 전언이 사실상 유일했습니다. 강탈한 정씨의 학생증이나 현금, 책 등 물증은 사건이 일어난 지 워낙 오래 지나 확보할 수 없었죠. 이에 재판부는 제3자가 전달한 '전문진술'도 경우에 따라 증거능력을 가질 수 있지만, 검찰이 제출한 해당 진술이 특별히 신빙할 수 있는 '특신상태'에서 이뤄진 것이라는 별다른 자료가 없어 증거로 쓸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또, 기소된 특수강도 특수강간 강도강간 혐의에 대해서는 공소시효(10년)가 지났다는 이유로 면소를 선고했습니다.
즉 1심 판결을 요약하면 "특수강도강간은 시효가 남았지만 증거부족으로 무죄, 특수강도 등 다른 혐의는 공소시효가 끝나 처벌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DNA 증거 등에 대한 실체적 판단 자체를 하지 않았다"는 거죠.
2015년 8월 2심에서도 재판부는 "피해자 속옷에서 발견된 정액의 유전자가 피고인의 것과 상당 부분 일치, 피고인이 단독 혹은 공범과 피해자를 강간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공소시효(10년)가 끝나 처벌할 수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범행 일부를 사실상 인정하면서도 공소시효 때문에 처벌을 못 한 겁니다.
특히 특수강도강간죄에 대해 검찰은 "항소심에서 새로 추가한 증인 H씨의 진술을 확인해 보니 K씨 등 범인들이 성폭행이 끝나기 전에 피해자 가방을 뒤져 학생증과 책 등을 갈취했기 때문에 특수강도강간에 해당한다"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피해자의 가방과 지갑은 고속도로 위에서 발견됐고, 책은 갓길에 흩어져 있는 상태였으며 학생증이나 현금을 강취당했다는 아무런 증거도 없다"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대법원도 2017년 7월 "일부 믿을 만한 내용이 있다고 하더라도 해당 진술과 DNA 감정서만으로 K씨가 피해자를 강간하고 소지품을 강취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는 부족하다"며 원심을 확정했습니다. 이후 K씨는 본국으로 강제 추방됐습니다.
(실망한 유족들도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민사 소송을 내 승소합니다. 법원은 수사기관의 부실한 초동수사로 인한 정신적 피해를 물어 지연손해금을 포함한 1억3,000만 원가량의 배상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죠.)
"스리랑카서도 1·2심 무죄... 판결 뒤집기 쉽지 않아"
이처럼 K씨의 성폭행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끝내 무죄로 결론 나자 처벌 방법을 고민하던 검찰은 스리랑카 법상으로 공소시효가 남은 사실을 확인하고 현지 검찰과 공조를 추진합니다. 검찰과 법무부는 스리랑카에 전담팀을 파견해 관련 증거·서류 등을 제출했고, 마침내 스리랑카 검찰이 범죄 사실을 인정해 K씨를 2018년 10월 현지 공소시효(20년) 만료 4일을 앞두고 재판에 넘깁니다. 다만 스리랑카 검찰은 정액이 몸속이 아닌 속옷에서 발견된 점을 감안해 강간죄가 아닌 성추행죄를 적용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리랑카 1·2심 재판부는 2021년 12월과 지난해 11월 증거불충분 등을 이유로 K씨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전문가들은 스리랑카 대법원에서도 결과를 뒤집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국내서도 증거불충분으로 처벌이 어려웠던 만큼 새로운 증거가 제시돼 K씨의 범행이라는 증명력이 높아지지 않는 한 스리랑카에서도 처벌하는 데 한계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오윤성 순천향대 경찰행정학과 교수 역시 "2심서 유죄가 나왔다면 모를까, 아주 특이한 경우를 제외하고 1, 2심서 무죄인 사건이 3심서 뒤집어질 확률은 높지 않다"며 "사건 초기 유족들의 성범죄 가능성 주장을 도외시했다가 나중에 재수사하려니까 처벌이 어려워졌다"고 안타까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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