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0시간 이상 실습해야 자격시험 응시
잡무 도맡지만 노동자 아니라 대가 '0'
정부는 "실습 교육 내실화 추진" 해법
편집자주
월급쟁이의 삶은 그저 '존버'만이 답일까요? 애환을 털어놓을 곳도, 뾰족한 해결책도 없는 막막함을 <한국일보>가 함께 위로해 드립니다. '그래도 출근'은 어쩌면 나와 똑같은 문제를 겪고 있는 노동자에게 건네는 전문가들의 조언을 담습니다.
“실습생은 ‘공짜’ 심부름꾼입니다.”
# 간호조무사 A씨에게 5개월에 걸친 실습 경험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다. 간호조무사가 되려면 ①간호학원 등에서 740시간 이상 이론교육을 받고 ②병원 등 의료기관에서 780시간 이상 실습을 한 뒤 ③자격시험까지 통과해야 한다. 기나긴 이론 수업을 끝낸 A씨는 드디어 병원에서 실무를 배울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렜다. 하지만 실습 첫날 기대는 산산조각 났다. 업무는 환자복 빨래, 설거지 같은 허드렛일이 대부분이었다. 심전도 검사를 어떻게 하는지 물어보면 돌아오는 답은 “학생은 몰라도 돼”, “인터넷 찾아봐”였다. 그렇게 780시간 내내 병원 잡무와 직원 뒤치다꺼리를 하고 받은 돈은 0원. A씨는 29일 “원래 하던 일까지 그만두고 간호조무사에 도전했는데 실습에서 뭔가 배운다는 보람은 전혀 없었다”며 “무임금 노동착취”라고 울분을 토했다.
# 지난해 5월부터 한 병원에서 간호조무사 실습을 하고 자격증을 딴 B씨도 사정은 비슷하다. 병원 실습 기간 가장 많이 했던 말은 “원무과는 이쪽입니다”, “이쪽 진료실로 가세요”였다. 환자가 없을 땐 쓰레기통을 비우고 진료대기실 의자를 소독하는가 하면, 약국에서 약품을 받아오기도 하고 문서를 코팅ㆍ파쇄하는 일이 업무의 전부였다. B씨는 “실습 업무가 비전문적인 데다, 단순하고 병원에 노동력을 제공하는 정도였다”며 “간호조무사와 상관없는 일을 이렇게 오랜 시간 배워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묻고 싶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실습생 열정페이로 年 2800억 아끼는 병원들
환자 간호 및 진료 업무를 보조하는 간호조무사 준비생들이 ‘열정페이’에 시달리고 있다. 시험 응시자격을 얻으려면 병원 등에서 적어도 780시간은 실습을 해야 하는데, 전문적 기능을 익히기는커녕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으며 단 한 푼의 급여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보람을 느끼는 것도 아니다. 실습생들 사이에선 “심부름꾼” “파출부” “노예” 같은 자조 섞인 푸념만 난무한다. 인건비 없이 사람을 쓰는 병원, 실습비 챙기기에 바쁜 학원, 수수방관하는 정부의 무관심 탓에 애꿎은 학생들의 노동력만 착취당하고 있다. 본래 취지에 맞게 실습 교육을 내실화하거나 근로자성(性)을 인정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개편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교육보다는 노동 착취에 가까운 ‘무늬만 실습’ 관행은 실태조사에서도 확인된다. 이상현 특성화고등학생권리연합회 이사장(노무사)이 지난해 5월 최근 3년 내 간호조무사 실습 교육을 받은 603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응답자 10명 중 7명(71.5%)이 “병원에서 인력이 부족한 업무에 실습생을 배치했다”고 답했다. “교육 프로그램과 상관없이 병원이 필요에 따라 수시로 다른 업무를 지시했다”는 답변도 75.1%나 됐다. 추가 집중면접조사(FGI)에서 역시 “설거지, 빨래, 세척, 개인 심부름, 은행ㆍ우체국 심부름 등 닥치는 대로 했다”, “결석하면 ‘네가 없어서 업무가 꼬였다’ 원망을 많이 들었다” 같은 증언이 쏟아졌다. 병원 측이 누군가는 해야 하지만, 누구도 꺼리는 필수 업무를 실습생에게 떠넘기고 있는 셈이다.
반면 간호 업무에서 벗어난 잡일만 하고도 의료기관에서 실습지원비를 받았다는 응답은 27.5%에 그쳤다. 이들의 월평균 수령액도 31만 원이 고작이었다. 주당 평균 실습시간(40.1시간)을 고려하면 턱없이 적은 금액이다. 원칙적으로 실습 기간 금전적 대가를 얻으면 실습으로 인정되지 않지만, 병원에서 관행적으로 교통비, 식비 등 실비를 일부 지원해준 것으로 보인다. 그나마 실습생 4명 중 3명은 이 같은 지원조차 없었다. 이 이사장은 ①한 해 간호조무사 실습생 규모(4만여 명) ②지난해 기준 시간당 최저임금(9,160원) ③실습시간(780시간) 등을 토대로 매년 의료기관이 무(無)임금 노동으로 벌어들이는 이익이 2,858억 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노동자 인정, 교육 내실화... 해법은?
무임금 노동만 문제가 아니다. 실습생들은 환자의 혈압ㆍ체온 측정 등 병원 직원들과 비슷한 일을 하지만, 산업재해보상 등 노동자로서의 법적 권리는 거의 누리지 못한다. 간호조무사들이 모여 있는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B형간염 바이러스 감염 위험이 있는데도 설명도 없이 수술실 청소를 해야 했다”, “(전염성 피부질환인) 옴 환자라는 공지도 안 하고 바이탈(호흡, 체온 등) 체크를 시킨다”는 글이 다수 올라와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유행 국면 때는 정부가 실습생까지 포함해 ‘백신 우선 접종’ 계획을 발표했지만, 일부 병원은 정식 직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실습생을 접종 대상에서 제외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명백하게 노무를 제공하고 있는 만큼 간호조무사 실습생의 근로자성도 보장돼야 한다.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로 인정받으면 최저임금법, 산업재해보상보험법, 고용보험법 등 각종 법률에 의해 보호를 받을 수 있다. 실제 교육부는 현장실습에 나서는 직업계 고교생들을 노동자로 보호하기 위해 2012년 학생과 기업 간 근로계약을 체결하도록 제도를 바꿔 2017년까지 시행하기도 했다. 전국특성화고노조 간호조무사분과 관계자는 “간호조무사 자격증 취득 후 실무 수습을 진행하는 형태로 제도가 바뀌면 노동자로 보호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정부는 궁극적으로 실습 교육을 내실화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입장이다. 의과대학생, 간호대학생 등도 면허 취득에 앞서 병원에서 임상 실습을 하는 상황에서 간호조무사 실습생에게만 임금을 지급하는 건 형평성에도, 실습 제도 취지에도 맞지 않는다는 논리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조무사 실습 내용이 다소 부실한 측면은 인정한다”면서도 “지난해 ‘표준실습교육과정’ 연구용역을 실시했고 실습의 질을 향상하기 위해 교육 과정을 개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실습 교육이 충실히 이행되면 기간이 너무 길다는 불만도 줄어들 것”이라고 자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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