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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글로리', 매끈한 지배의 세계를 승인하는 복수극

입력
2023.04.01 04:30
수정
2023.04.01 13:17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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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더 글로리'에 깔린 불편한 쾌감

※다량의 '더 글로리'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 속 고등학생 문동은은 학교폭력을 경찰에 신고했지만 돌아온 건 선생님의 질타였다.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 속 고등학생 문동은은 학교폭력을 경찰에 신고했지만 돌아온 건 선생님의 질타였다. 넷플릭스 제공

아직도 고등학교 시절 학생주임 교사의 얼굴은 또렷이 기억난다.

그날, 아이들은 유난히 소란스러웠다. 늦봄, 아직은 고 3이 아니어서 계절을 타는 여유를 부릴 수 있어서였을까. 아침부터 저녁 자율학습 시간까지 뭔가 들뜬 분위기가 가라앉지 않았다. 늦은 저녁 자율학습 시간 앞문을 소리 나게 열고 들어선 학생주임은 반장이었던 내게 가장 떠든 학생들의 이름을 대라고 했다. 나는 모두 같이 어울렸기에 특별히 더 떠든 학생은 없다고 했다. 차라리 한 대 맞는 게 낫겠다 싶은 침묵이 지나간 후 그는 우리 모두에게 책상 위에 올라가 꿇어앉으라고 했다. 우리는 그 자세로 몇 시간을 꿇어앉아 있었고 그는 한 달간 수업에 들어오지 않았다. 쉬는 시간마다 교무실에 가서 죄송하다고 통사정을 했지만 마치 내가 앞에 없는 것같이, 갑옷을 입은 것 같은 차갑고도 딱딱한 얼굴로 다른 일을 하던 그를 잊을 수 없다.

1980년대 중·고등학교에서 이 정도 일은 폭력 축에 끼지도 못 했다. 학교에서의 집단 기합이나 구타는 너무 흔한 일이었다. 폭력적 군사문화가 전 사회를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K드라마의 경쟁력, 스트레스로 가득한 한국인의 삶

이런 학창 시절을 보낸 이들에게 김은숙의 '더 글로리'는 강렬한 쾌감을 선사한다. 주인공 문동은의 고교 담임은 돈깨나 있는 집안 자식들인 박연진 무리가 문동은에게 가하는 폭력에 눈감을 뿐 아니라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할 말을 하는 문동은을 무자비하게 구타한다. 그랬던 그가 아들에게 죽음을 당할 때 내심 고소해한 것이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동은이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한 학교에서 부딪히게 되는 추 선생은 여자 아동들의 신체 사진을 몰래 찍어대는 작자다. 그가 고교 시절 동은을 괴롭힌 무리 중 한 명이었던 전재준의 무자비한 주먹에 나가떨어질 때 많은 시청자들이 환호성을 지르지 않았을까. 이렇듯 '더 글로리'는 많은 한국인들이 지나온 학교에서의 폭력적 시간을 소환하며 고통과 쾌락을 번갈아 제공하는 방식으로 인기를 모았다.

이는 최근 몇 년간 전 세계적으로 큰 화제가 된 K드라마의 어떤 경향이기도 하다. 한국 특유의 압축적 근대화 과정, 그 과정에 수반된 전쟁과 같은 삶, 그리고 날것의 폭력이 '오징어 게임'(2021)을 비롯한 최근 한국 드라마의 주요 테마다. 특히 국내 공중파 방송에 비해 재현 수위에서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는 글로벌 OTT가 대세로 자리 잡으면서 한국 드라마의 상상력은 스트레스 가득한 한국인의 삶을 세밀하게 그려내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아이러니하게도 K드라마의 경쟁력은 여기에 있다. 양극화가 심화되어 가는 글로벌 사회에서 이는 더 이상 한국인만의 삶이 아닌 것이다.

좌절과 그 좌절을 폭력적으로 극복하는 쾌감의 반복, 이것이야말로 전투적인 한국인의 일상에 바탕을 둔 K드라마가 발전시킨 영상 미학일지도 모르겠다. 폭력 피해자 문동은의 복수를 그린 판타지극으로서의 '더 글로리'는 그 정점에 있다.

‘나이스한 X새끼’에게 끌리는 이유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문동은과 하도영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문동은과 하도영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넷플릭스 제공

이렇듯 모든 것이 명료한 '더 글로리'에서 명료하지 않은 지점들이 있다. 박연진의 남편 하도영과 문동은의 조력자 주여정의 아버지 주 원장이 등장하는 장면들이 그러하다.

우선 하도영은 작가의 한 줄 설명에 의하면 '나이스한 X새끼'로, 자신이 특권의식을 가졌다는 것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특권층이다. 건설기업 대표인 그는 개인 운전기사가 자신을 비 오는 차 밖에서 우산을 손수 들고 잠시 기다리게 했다는 이유로 그를 말없이 해고한다. 사실 운전기사는 누군가가 하도영에게 선물한 고가의 와인을 찾아 건네주기 위해 그랬는데도 말이다. 하도영은 그 고가의 와인을 선심 쓰듯 운전기사에게 안기고 슈퍼마켓에서 파는 1만 원짜리 와인과 비교해서 마시면 고가 와인의 맛을 알게 될 것이라고 모욕한다. 이런 하도영이 우연히 알게 된 문동은과 바둑을 두며 그녀에게 매력을 느끼고 자신의 핏줄도 아닌 딸 예솔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줄 때 시청자들은 그의 'X새끼성'보다 '나이스함'에 끌리게 된다.

사실 박연진의 잘못이 밝혀졌을 때 그가 분노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체면이 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딸에 대한 보호는 이제까지 자신의 딸로 알려진 아이가 다른 남성의 딸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당할 망신과 체면 구김에 대한 일종의 공격적 방어다. 시청자들이 하도영에게서 무엇을 느껴야 하는지 혼란스러운 순간, 하도영은 문동은을 괴롭히고 박연진과의 사이에서 예솔을 낳은 전재준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영웅으로 등장한다. 이 장면에서 '더 글로리'의 진정한 복수는 문동은이 아니라 하도영이 한다는 느낌마저 받게 된다.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복수의 동료인 주여정과 문동은이 나란히 서 있다.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복수의 동료인 주여정과 문동은이 나란히 서 있다. 넷플릭스 제공

문동은의 조력자 주여정의 고통과 그에 대한 판타지적 복수 또한 문제적이다. 주여정은 주병원 원장이자 존경받는 인품의 소유자였던 아버지가 살인자를 치료하다가 그에게 살해당한 일로 고통에 시달린다. 왜 선한 나의 아버지가 아무런 이유 없이 살해당했을까를 질문하며 고통스러워하는 선량한 주여정에게 감정이입하지 않는 시청자는 별로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에도 곱씹어볼 장면이 있다. 피를 철철 흘리며 고통스러워하는 살인자 강영천을 다른 병원으로 옮기자는 의사들에게 주 원장은 "그럼 이 환자는 어떻게 하느냐?"가 아니라 "그럼 그 병원 의사들은 어떻게 하느냐?"라고 되묻는다. 뒤이어 아들 여정과의 약속을 취소하면서 아들에게 라면을 먹지는 말라고 전해달라고 한다. 이 모든 말을 듣고 있는 강영천이 혼자 라면을 먹는 것도 안타까운 주여정에게 다른 의사들을 번거롭게 할 골칫덩어리인 자신을 대비시켜 '모욕'을 느끼는 순간이다. 마취에서 깬 강영천은 메스로 주 원장을 찌른다. 그리하여 이 장면은 주 원장의 무의식적 특권의식을 드러내기보다 살인자를 더욱 사이코패스로 보이게 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두말할 것 없이 그런 말 한마디를 한 것은 죽음을 당할 만큼의 죄가 아니다. 그러나 이 드라마가 부와 권력, 전문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에서 비롯된 특권의식을 공기와 같이 두르고 있는 하도영과 주 원장을 매력적인 인물로 그리는 것은 고민스럽다. 하도영은 문동은과 시종일관 성적 긴장감을 유지하며 (물론 이는 두드러지게 표면화되거나 진전되지 않는다. 그랬다면 '더 글로리'는 치정극이 되었을 것인데 치정극은 '더 글로리'의 결말과 같은 일견 매끈한 권선징악으로 끝낼 수 있는 장르가 아니다) 피도 섞이지 않은 어린 딸을 보호한다. 사실 그가 전재준을 죽인 이유는 자신의 것인 아내와 딸을 건드린 데 대한 지극히 가부장적인 분노인데, 드라마는 하도영의 복수와 문동은의 복수를 구별하지 않는다. 나아가 주여정이 하려는 복수도 이와 다르지 않은 것으로 그린다.

또한 하도영과 주 원장은 드라마의 주인공 남녀, 문동은과 주여정의 애정과 욕망, 존경의 대상이다. 사실 이 드라마에서 처벌받는 악인들은 악의 원형적 이미지들의 집합체여서 시청자들에게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그들을 편안하게 마음껏 미워하는 데 열중한 우리들은 이들이 하도영과 주 원장에 미치지 못하는 부와 권력의 소유자들임을 떠올릴 필요가 없다.

폭력에의 분개, 지배에의 욕망

30여 년 전 내게, 이런 곳에 초대받다니 대단히 고맙지 않냐고 말했던 이의 우아하면서도 고압적인 얼굴과 목소리가 아직도 또렷이 기억난다.

그해, 생애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갔다. 도착한 도시가 마침 친구 아버지가 외교관으로 근무하던 도시여서 관저에서 하룻밤 자고 가라던 친구의 호의가 반가웠다. 다소 어색한 하루가 지나고 다음 날 아침 식사 자리에서 친구의 가족 중 한 명이 한 말이다. 선진국이었고, 멋진 관저이긴 했다.

내 고등학교 시절 학생주임이 했던 일은 이제 가능하지 않다. 학생들이나 학부모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고, SNS상에 어떤 이미지와 이야기가 회자될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친구 가족이 한 말은 어떨까? 그 말은 이제 어디서나 다양한 방식으로 되풀이되고 있다.

무엇보다 섬뜩한 것은 우리들이 곧잘 스스로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그런 모욕을 한다는 사실이다. 외부적 폭력이 횡행하던 시대를 건너 도착한 매끈한 지배 시대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더 글로리'는 표면적으로는 폭력에 분개하지만 보다 은밀하게는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의 매끈한 지배를 욕망하는 정서를 건드린다. 이 드라마로 현실의 '정순신 사태'에 분개하는 제스처가 넘쳐나지만 무엇을 얼마만큼 변화시킬 수 있을지 회의적인 이유다.

'더 글로리'는 아버지의 복수를 감행하려는 주여정과 그를 돕기로 한 문동은을 보여주며 끝난다. 그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 우리는 이들이 어떤 선택을 하는 이야기에 환호할까? 어떤 선택의 이야기가 펼쳐질지는 우리가 어떤 세상에 살기를 원하는지에 달려 있다.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습니다.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 활동가인 이한 작가와 김신현경 서울여대 교양대학 교수가 번갈아 글을 씁니다.

김신현경 서울여대 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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