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부터 말만 시스템 반도체 키워야
반도체 전략 무기화…정부 육성 의지 필요
“팹리스-파운드리 연계 지원 등 목소리 들어야”
메모리 반도체 대비 고부가가치 업종인 시스템 반도체를 키워야 한다는 목소리는 20년 전인 2000년대 초반부터 이어졌다. 메모리 반도체 시장은 업체 사이에 사생결단식 치킨게임이 끊임없이 일어났으니 국가적으로도 한쪽으로 쏠릴 경우 전체 경제에 불확실성이 커질 수 있어서다.
하지만 그동안 정부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민간 영역은 기업이 알아서 잘한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보니 삼성전자, SK하이닉스와 같은 대기업만 살아남는 결과를 가져왔다. 반도체 지원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될 때마다 특혜 시비가 따라올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반도체 산업이 좋지 않을 때에는 단기적 지원만 되풀이되면서 생태계 자체가 튼튼하게 자리매김하지 못했다.
미국, 중국, 일본 사활 걸고 반도체 지원하는데…
하지만 최근 전 세계에서 첨단 반도체가 국가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전략 물자로 인식되는 만큼 주요국에서는 사활을 걸고 반도체 산업 육성에 나서고 있다. 미국은 본토 내 반도체 생산 설비를 구축할 경우 막대한 인센티브를 제시하는 한편 동맹국 기업에도 핵심 정보를 공개할 것을 대놓고 요구하고 있다. 중국은 2015년부터 '반도체 굴기'를 내세우며 기업들에 천문학적 비용을 지원했다. 일본도 2025년까지 2나노미터 최첨단 미세공정 반도체 시범생산 설비를 구축하며 과거의 명성을 되찾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반도체 전문가들은 우리 정부도 확고한 육성 의지를 가지고 현장에 꼭 필요한 지원책을 서둘러 내놓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우선 정부가 시스템 반도체 분야 중 팹리스 기업(생산설비 없이 반도체 설계만 하는 기업)과 파운드리 기업(자체 제품 없이 외부 업체의 반도체만 생산하는 기업) 사이에 연결을 강화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내 중소 팹리스 기업들이 겪는 애로 중 하나는 자신들이 개발한 반도체를 제때 생산해 줄 파운드리 기업을 찾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국내에선 삼성전자가 파운드리 사업을 하는데 주로 주문량이 많은 퀄컴, AMD 등 글로벌 대형 고객사들의 첨단 제품을 우선적으로 생산한다. 김영준 매그나칩 대표는 "지난해 반도체 부품난 당시 대만에서는 정부가 TSMC에 자국 시스템 반도체 기업의 물량을 우선적으로 맡도록 했다"며 "반면 국내 시스템 반도체 기업들은 대만이나 중국 파운드리 기업의 눈치를 보며 기다려야 해 큰 피해를 봤다"고 말했다.
자금 지원도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김 대표는 "설계한 반도체를 시험 제작해 테스트하는 비용만 20억 원이 넘는데 중소기업 입장에선 상당히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라며 "반면 중국의 경우 정부가 그 비용을 다 대주면서 시스템 반도체 기업들의 성장세가 가파르다"고 말했다. 지난해 전국경제인연합회가 발표한 '글로벌 시총 100대 반도체 기업 경영지표 비교' 보고서에 따르면 글로벌 시총 100대 반도체 기업 중 한국기업은 3개(삼성전자, SK하이닉스, SK스퀘어)밖에 없는 반면 중국은 42개사나 이름을 올렸다.
"정부가 나서서 신규 시장 창출해야"
전문가들은 정부가 단순히 설비 투자에 대해 세제혜택을 주는 현재의 방식 외에 새로운 시장 자체를 만들어주는 지원책도 효과적일 수 있다고 조언한다. 인공지능(AI) 반도체 스타트업들은 데이터센터 운영 기업들에 자사의 AI 반도체를 판매해야 하는데, 실제 환경에서 이를 적용한 사례 자체를 확보하기 어려워 영업에 애를 먹고 있다. 대규모 인프라 투자를 해야 하는 데이터센터 기업 입장에선 성능과 호환성 측면에서 검증된 엔비디아 제품을 선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우리 스타트업들이 엔비디아보다 성능이 더 우수하면서도 가격이 싼 제품을 출시하고도 시장에서 선택을 받지 못할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퓨리오사AI 관계자는 "성능 면에서 엔비디아보다 몇 배 이상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데도 고객들은 스타트업이 언제 없어질지 모른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이에 대해 ①국산 AI 반도체를 채택한 기업에 보조금을 주거나 ②공공 분야에서 선제적으로 국산 AI 반도체를 활용한 데이터센터를 구축하는 방안이 제안된다.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는 "일본은 정부가 자국의 반도체 기업과 자동차 기업을 연결시키고 대만의 TSMC에게까지 보조금을 주고 자국에 공장을 짓도록 하면서 차량용 반도체 시장을 육성하는데 노력하고 있다"며 "우리 정부 역시 새로운 시장에 우리 기업들이 적극 들어올 수 있게 생태계를 형성하게 돕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해외 시장을 겨냥해 경쟁력 있는 국내 중소 시스템 반도체 기업끼리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K팝', 'K웹툰'처럼 글로벌 시스템 반도체 시장에서 우리 기업들이 인지도가 낮은 만큼 하나의 브랜드를 만들어 빅테크 기업들과 협상에 나서는 환경을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왕성호 한국팹리스산업협회 대외협력위원장(네메시스 대표)은 "우리 기업들이 해외 마케팅 능력이 너무 약해 개별로 해외에 나갈 경우 각개격파당하기 십상이다"며 "현재 협회를 중심으로 각 분야별 기업들끼리 공동의 브랜드 그룹을 만들어 해외 시장에서 브랜딩 파워를 올리고, 공동으로 프로모션이나 협상을 진행하는 식의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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