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 초기 선교 유적지 몰려 있는 강화·인천
지난 3일 오후 인천 중구의 내동교회. 이 땅에 처음 세워진 성공회 교회인 ‘성 미카엘 교회’를 계승한 이 교회 마당에는 한자로 ‘영국병원(英國病院)’이라고 새겨진 작은 비석이 세워져 있다. 교회 마당에 웬 병원 비석일까.
초기 기독교 선교사(史)를 알면 그 궁금증을 풀 수 있다. 성공회가 이 자리에서 1891년부터 1916년까지 ‘성 누가병원’을 운영했기 때문. 내과의사이자 성공회 선교사였던 엘리 바 랜디스와 간호교육을 받은 수녀들이 이곳에서 조선인들에게 무료로 서구식 진료를 선보였다. 충청도와 황해도에서 환자들이 찾아올 정도였다. 감동한 고종이 병원에 부지도 제공했다. 허은철 총신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랜디스 등 선교사들이 제물포항에 도착한 1890년은 성공회의 조선 선교가 시작된 시점"이라고 설명했다.
개신교의 한국 전래 138년(5일)을 맞아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 관계자들과 3, 4일 이틀간 찾은 인천과 강화도 지역에 산재한 기독교 근대문화유산을 둘러봤다.
실제로 경인선 인천역 인근 개항장 지역 일대에는 인천에 처음으로 세워진 교회인 내리교회와 내동교회 등 기념비적인 개신교 근대문화유산이 몰려 있다. 1883년 제물포항이 개항되면서 서양 선교사들이 인천을 주요 선교 거점으로 점찍었기 때문이다. 인천항을 바라보는 자리에 세워진 17m 높이의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탑’이 대표적이다. 기념탑은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오후 3시에 미국 개신교 선교사인 H.G. 아펜젤러(북감리회)와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북장로회)가 인근 지점에 도착한 것을 기념해 세워졌다. 종교계는 이날을 국내 첫 개신교 전파일로 보고 있다.
기념탑에는 이들이 조선에 도착해 올린 기도가 새겨져 있다. “오늘 사망의 빗장을 부수시고 부활하신 주님께 간구하오니 어둠 속에서 억압을 받고 있는 조선 백성들에게 밝은 빛과 자유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펜젤러는 이후 한양에서 선교하면서 교육기관인 ‘배제학당’과 정동제일교회를 건립한다. 언더우드는 새문안교회를 건립했고 1916년 조선기독교대학을 세운다. 조선기독교대학은 연희전문학교를 거쳐 세브란스의과대학과 합쳐져 현재의 연세대가 됐다.
강화도 역시 중요한 초기 선교지 가운데 하나였다. 감리교가 일찌감치 자리를 잡은 곳으로 현재 교회 수가 210곳에 달한다. 특히 교육 선교가 활발해 기독교계 학교들이 1900년 무렵을 전후해 잇달아 문을 열었다. 성공회가 1908년 설립한 성모마리아여학교의 경우 7세부터 18세까지의 여학생에게 한문과 지리, 산수, 습자, 재봉 및 가사를 매일 가르쳤다. 다만 이들은 조선총독부의 통제를 받는 공립학교들이 설립되면서 대부분 폐교되거나 공립학교에 흡수됐다. 권순웅 한교총 공동대표회장은 “개신교 선교사들이 이 땅에 발을 내딛으면서 가장 중요한 목적은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는 것이었다”면서도 “동시에 그들은 이곳에 학교를 세웠다. 조선과 대한민국이 발전할 수 있도록 섬기는 중추적 역할을 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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