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미셸 여 수상소감 편집, 여성을 지우는 사회
한동안 고난과 역경에 맞부딪힐 때면(그러니까 원고 마감 같은 것에 시달릴 때면) 또 다른 우주에 사는 이한의 힘을 빌려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는 망상으로 도피하곤 했다. 이게 다 양자경(미셸 여·량쯔충) 주연의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때문이다. 멀티버스(다중우주)라는 다소 난해하고 낯선 배경을 설정으로 한 이 영화는 참신한 소재와 혁신적인 편집, 의미심장한 주제 의식과 신들린 듯한 연기 등으로 엄청난 흥행과 수상 실적을 올리며 2022년 최고의 영화로 꼽혔다. 그런데 최근 국내에서는 조금 다른 이유로 미셸 여가 언론에 회자됐다. 지난달 제95회 아카데미시상식에서 미셸 여가 이 영화를 통해 아시아계 배우 최초로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는데, 한 방송사가 그의 수상소감 중, "여성 여러분(And ladies)"이라는 메시지를 쏙 빼고 방송에 내보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편집은 미셸 여 수상소감 의미와 메시지를 왜곡하는 악의적이고 차별적인 편집이라며 강력하게 항의했고 해당 방송사는 논란이 커지자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며 부랴부랴 영상을 교체했다.
“왜 남성가족부는 없어요?”
이런 일련의 사태가 마냥 낯설지 않다. 강의를 하면서 '여성가족부', '여성긴급전화'와 같은 단어를 언급할 때면 나이를 불문하고 많은 남성들이 빠짐없이 하는 이야기가 있다. 바로 "왜 꼭 '여성'이에요?"라는 볼멘 질문이다. 이 원한 섞인 질문은 곧 왜 남성가족부는 없냐는 하소연으로, 페미니즘이 아닌 '양성평등운동'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로 떠돌며 주변을 오래 괴롭혔다. 사실 성폭력 피해를 입는 남성도 있고 가부장제와 성차별이 만들어내는 문제의 여파가 남성에게까지 이어질 수 있으니, 남성'도' 배제하지 말라는 메시지 자체는 제법 그럴싸해 보인다. 그러나 이런 목소리의 대부분이 실제로 남성 성폭력 피해자 지원이나 성차별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등장하는 게 아닌, 오직 '여성'이라는 단어에만 꽂혀서 '역차별'을 외치며 기존 시도에 훼방을 놓는 식으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그 의도가 마냥 성평등을 이루고자 하는 게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사실 교육현장에서 이런 질문 아닌 질문은 얼마든지 환영이다. 오히려 이 질의응답이 교육 참여자들 마음에 남아 있던 묵은 의아함을 해소시켜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내심 이런 질문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실제로 일단 저런 질문이 나오면 해당 질문을 한 사람의 관심과 용기에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되묻는다. "왜 '흑인'인권운동과 '장애'인권운동일까요?" 흑인이 아닌 다른 인종의 인권은, 장애인이 아닌 비장애인의 인권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다만 역사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인종차별과 비장애인 중심주의 사회의 여파가 흑인, 장애인에게 가장 가혹하게 가해져 왔으며, 그것을 직시한 당사자들이 문제 해결을 위해 가장 적극적으로 목소리 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두루뭉술하게 '모두를 위한 인권운동'이 아닌, '흑인'인권운동, '장애'인권운동이라는 명칭이 여전히 필요하다. 이 명칭은 곧 운동 주체를 조명하고 동시에 지금 우리 사회의 가장 약한 고리를 드러내는 쉽고 효과적인 방법이다.
지난하지만 꼭 필요한 이해의 과정
물론 이렇게 설명해도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 찝찝함을 갖고 있는 참여자들이 있다. 그럴 때는 이어서 우리의 인권이 제로섬 게임이 아님을 설명한다. 경험적으로 인권 이야기에 반감을 갖는 이들은 대개 우락부락하거나 학급에서 주도권을 쥐는 이들이 아닐 때가 많았다. 다시 말해 대체로 헤게모니적인 남성성을 갖지 못한 이들의 반감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어쩌면 이들이 성평등으로 인한 수혜를 가장 많이 받을 수 있을 텐데 왜 이러한 저항이 가장 크게 나타날까? 합리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을지 모르나 이들의 입장에서 이 선택은 당연하다. 이들이 오늘 우리 사회를 살아가며 체득한 현실, 바로 치열한 경쟁에서 탈락할지 모른다는 무시무시한 공포를 늘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을 위한 정책, 지원이 늘어날 경우 자신은 더더욱 경쟁에서 뒤처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더 큰 반감을 보인다. 따라서 이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인권은 제로섬 게임처럼 서로의 것을 뺏고 빼앗는 싸움이 아니며, 함께 나아지는 것임을 설명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럴 때는 이해를 돕기 위해 지하철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과정을 소개한다. 장애인권운동의 이동권 투쟁으로 지하철에 엘리베이터가 만들어졌다. 이로 인해 장애인'만' 편해진 게 아니라 노인, 유아차를 모는 사람, 무거운 짐을 든 사람, 오늘따라 유난히 피곤한 사람 등 모두가 편하게 지하철을 탈 수 있게 됐다. 이처럼 인권증진으로 인한 변화는 우리 모두의 삶을 나아지게 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물론 이 설명이 충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짧은 시간에 직관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제법 효과적인 방법이다. 가끔 이 과정이 지지부진하고 어렵게 느껴져도 이런 과정을 통해 고개를 끄덕이고 이해한 듯한 모습을 보이는 학습 참여자를 보면서 보람과 변화 가능성을 느낀다.
사실 청소년, 나아가 청년까지 이런 생각을 지니게 된 까닭을 너른 마음으로 유추해 볼 여지는 또 있다. 여성가족부에서 발표한 2021년 국가성평등보고서의 분야별 성평등 수준에 따르면 2020년 교육·직업훈련 분야의 성평등 수준은 94.2점으로 상당히 높은 편이다. 교육영역에서 활동하는 분들의 약진으로 학교의 제도적 성차별이 많이 줄어든 결과다. 그러다 보니 이곳을 주무대 삼은 청소년, 청년기 사람들에게 성차별은 까마득한 과거 일처럼 느껴진다. 막상 내 주변에는 여성들이 공부도 잘하고 성적도 잘 받고 좋은 대학도 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현실은 교육·직업훈련 분야에서 멈추지 않는다. 같은 자료에 따르면, 경제활동 분야는 76.1점, 의사결정 분야는 37.0점이다. 즉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는 제법 성평등했으나, 그곳을 벗어나 직업을 구하는 과정에서, 또 월급을 받고 다양한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성평등 수준은 나아가야 할 길이 한참인 셈이다. 그렇다고 우리 사회가 청소년, 청년에게 이런 성차별적인 현실을 교육이나 기타 방법으로 잘 이야기하지도 않으니, 이들이 '여성'이라는 단어에 어리둥절해하는 것을 마냥 비난만 할 수도 없다.
책임지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빛나는 미셸 여처럼
진짜 문제는 이들의 이러한 반감 그 자체가 아니라, 갈등을 회피하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무책임하게 문제를 감추려 할 때 발생한다. 미셸 여의 수상소감에서 '여성들'이라는 표현을 지울 때, 해당 방송사의 담당자가 악의적인 의도로 여성의 성취를 깎아내리려 한 것은 아닐 거라고 믿는다. 추측건대, '여성'이라는 표현이 들어갔을 때 앞서 언급한 교실에서의 반응과 그로 인한 갈등이 두렵고 피곤하다는 마음이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미셸 여 수상소감의 '여성들'이라는 표현은 더 중요하고 빠져서는 안 되는 의미가 있다. 바로 그 반감이 미셸 여에 앞선 수많은 여성 배우들이 좋은 배역을 맡는 데 어려움을 겪고 훌륭한 연기에도 수상을 하기 어려웠던 큰 이유이기 때문이며, 그럼에도 계속된 여성들의 노력과 시도가 반감을 뚫고 미셸 여를 그 수상 무대 위로 불러낸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셸 여의 수상소감에서 '여성들'을 지우는 건, 그토록 어려운 환경에서도 계속해서 목소리 냈던 과거의 수많은 여성과 미셸 여를 보며 꿈을 키워 나갈 미래의 수많은 여성을 지우고 그 반감에 힘을 싣는 것이나 다름없다.
더욱 착잡한 것은 이것이 비단 미셸 여의 수상소감에 그치지 않고 우리 사회 전반에서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가고 있음에도 정치인들이 오히려 이러한 반감에 올라타 여성 지우기를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다. 당장 현 정권의 여성가족부를 향한 태도만 봐도 그렇다. 여성가족부가 사라지기는커녕 그 기능과 예산이 확대되어도 모자란 지경인데 여성가족부 예산 규모도 모르고 쏟아내는 혐오에 편승하여 여성가족부를 없애겠다고 하는 판국이다. 어디 그뿐일까, 매년 교육자료로 유용하게 써 왔던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은 '통계로 보는 남녀의 삶'이 됐고 지원사업, 정책명에서는 '여성'과 '젠더'가 사라지고 있다. 내용은 바뀌지 않았으니까, 좋은 게 좋은 거니까 하고 넘어가도 괜찮을까?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책임지지 않으면 그로 인한 차별과 폭력, 혐오는 더 크고 강하게 우리의 일상에 파문을 만든다. 당장 정치권에서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막무가내식 메시지가 발신된 뒤, 교육현장에서는 여가부 통계와 자료를 믿을 수 없다는 저항에 시달려야 했다. 나름의 직업정신을 가지고 현장에서 쏟아지는 질문과 저항에 얼마든지 응답할 수 있지만 함께 책임을 져야 할 이들이 이런 횡포로 훼방을 놓을 때면 때로 힘이 쭉 빠진다. 그러나 이렇게 변화에 저항하고 그 변화를 감추려는 자들이 있음에도 우리 앞에는 영화에서 미셸 여가 연기했던 멀티버스 속 수많은 에블린만큼이나 변화를 위해 목소리 내는 수많은 이들이 있고 끝끝내 감출 수 없는 빛으로 여우주연상을 거머쥐며 모두에게 희망을 안겨준 미셸 여 같은 사람들이 있기에, '희망과 가능성의 불꽃'은 꺼지지 않으며 우리는 결코 포기할 수 없다.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습니다.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 활동가인 이한 작가와 김신현경 서울여대 교양대학 교수가 번갈아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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