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망하지 않았으면 평생 이름 한 번 들어보기 힘들었을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총 자산의 절반 이상을 미 국채 투자에 몰빵했다가→예금 인출 압박에 시달려 헐값에 이를 팔더니→부실한 곳간이 들통나→55조 원 규모의 뱅크런(대규모 예금인출 사태)으로→위기 발생 이틀 만에 초고속 파산한 은행이다. 가장 안전해야 할 은행이, 다른 나라도 아닌 미국의 은행이, 그것도 총 자산이 우리 돈 260조 원대에 달하는 중견은행이 맥없이 부도를 맞았다. 위기를 직감한 글로벌 금융시장의 발작은 당연했다.
망하려면 나라도 망한다지만, 일반 기업과 달리 은행이 망하는 건 차원이 다른 파급력을 가진다. 이런 식이다. 내 돈 맡긴 은행이 휘청거린다는데 느긋할 사람은 없다. 뱅크런은 불가피하다. 문제는 ①한 번 뱅크런이 발생하면 그 여파가 해당 은행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른 은행 예금자들도 덩달아 공포에 질린다. 멀쩡했던 은행까지 잇따라 휘청대는 이른바 '뱅크데믹(은행과 팬데믹을 합친 말)'이다. ②은행이 망하면 기업은 돈줄이 쩍쩍 마른다. '얼마나 상황이 안 좋길래 은행이 다 무너지냐'는 극도의 불안 심리가 시장을 파고든 결과 ③금융시장을 굴러가게 하는 신뢰(신용)가 깨진다. 반년 전 우리도 '레고랜드 사태' 때 경험했고 경악했던 일이다.
정부가 은행발(發) 위기에 발벗고 나서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은행을 혼자 망하게 내버려두면 너무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걸 알아서다. SVB 사태 직후 미국 정부가 예금 전액 보장을 선언(이후 재닛 옐런 미 재무장관이 한 발 빼긴 했지만)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자금난에 빠져 허우적대던 167년 역사의 투자은행 크레디트 스위스(CS)도 스위스 정부의 대규모 자금 수혈을 발판 삼아 현지 1위 은행인 UBS에 겨우 팔렸다. 망할 때 망하더라도 '연쇄 부도'는 막자는 절박함이 정부의 등을 떠민다.
SVB 사태 한 달. 그래서 위기는 끝난 걸까. 파도는 잠잠해진 듯하다. 하지만 소위 전문가들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급한 불은 껐지만 워낙 잔불이 많아 또 다른 위기에 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다. 아미트 세루 미 스탠퍼드대 교수는 급격한 금리 인상 여파로 SVB보다 더 큰 자산가치 손실률을 기록 중인 미국 은행이 500여 곳에 달한다는 연구 결과를 최근 내놨다. 미국 전체 은행의 11%에 달하는 규모다. '제2의 SVB'가 수두룩하단 얘기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천천히 시스템을 갉아먹는 '슬로 모션(Slow-Motion)' 위기에 금융계가 대비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수습에 나섰던 '소방수 트리오'의 회고록 '위기의 징조들'(2019)을 다시 꺼내본다. 연방준비제도(Fed)의 14대 의장을 지낸 벤 버냉키, 각각 조지 W.부시와 버락 오바마 정부에서 재무장관을 지낸 헨리 폴슨 주니어와 티머시 가이트너는 "금융위기는 반드시 재발한다"고 경고한다. "금융위기를 막아낼 완전한 예방책은 없다"면서 평화를 위해 전쟁에 대비하듯 "금융 시스템 개혁에 나서야 한다"는 게 최악의 금융위기를 눈앞에서 마주했던 이들의 조언이다. 대내외 악재로 가뜩이나 살얼음판인 한국 금융시장에 주는 메시지가 적지 않다. 언제나 위기는 천천히, 그러나 강하게 세계를 덮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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