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집은 ‘사고파는 것’이기 전에 ‘삶을 사는 곳’입니다. 집에 맞춘 삶을 살고 있지는 않나요? 삶에, 또한 사람에 맞춰 지은 전국의 집을 찾아 소개하는 기획을 금요일 격주로 <한국일보>에 연재합니다.
서울 은평구 진관동. 아파트와 시장이 즐비한 거리를 지나 한산한 도로에 진입하면 서울이라고 믿기 힘든 분위기를 간직한 고즈넉한 한옥마을이 나온다. 건축주 정보환(61) 문경민(61) 부부는 병풍같이 펼쳐진 북한산 아래 수십 채 한옥이 모여 있는 이 마을 초입 작은 터에 '정다운집'(대지 면적 236㎡, 연면적 135㎡)을 지었다. 일 년째 한옥살이 중인 부부는 하나하나 손수 매만져 지은 집에서 나무향기와 사람향기가 그득한 황혼을 누리는 중이라고 했다. "예전엔 집을 나서기 바빴는데 지금은 집에 가만히 있는데도 일과 인연이 넘치네요." '정이 구름처럼 몰려오는 집(情多雲集)'이라는 이름 덕택일까. 정다운집은 밀려드는 다정한 마음에 힘입어 지난해 서울시 우수 한옥 심사에서 대상과 시민공감상을 수상했다.
은퇴 이후의 터전을 고민하던 부부는 원래 서울이 아닌 대구에서 한옥을 리모델링해 살 요량이었다. 직업 군인인 남편 정씨를 따라 온 가족이 전국을 돌아다니다 정착한 대구 근교에 있는 오래된 한옥이었다. "어린 시절 한옥에 살던 따뜻한 기억을 간직해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노후를 한옥에서 보내기로 마음먹었다"며 "이왕이면 서울에 자리 잡은 자녀들 가까이에서 살면 좋겠다 싶어 옛집을 뒤로하고 이곳에 새 집을 짓게 됐다"고 설명했다.
한옥을 짓겠다는 일념으로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땅을 구입했지만 본격적인 집 짓기는 무려 6년이 지난 뒤에야 시작됐다. "일반 주택에 비해 건축비가 비싸 비용을 마련하는 데 수년이 걸렸고 다시 우리가 지향하는 집을 고민하고 전문가를 찾는 데까지 한참이 걸렸죠."
무엇보다 한옥 고유의 아름다움을 살리고 싶었던 부부는 전통 건축양식을 고증해줄 대목(大木) 장인을 신중하게 골랐고, 그 대목 장인의 소개로 한옥 설계 경험이 풍부한 어번디테일 건축사사무소의 텐들러 다니엘 소장, 최지희 소장과도 인연을 맺었다. "한옥 짓기를 결정하면서부터 어떤 집을 지을지 수없이 상상했어요. 두 건축가는 우리의 생각을 적극 지지해주고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줬지요. 전적으로 믿고 맡길 수 있었어요."
흙 마당과 누마루를 품은 따뜻한 한옥
'정다운집'은 마당을 중심으로 2층 본채와 단층 별채가 분리된 한옥이다. 외부에서 보면 대문과 접해 외벽 역할을 하는 일명 '문간채'의 지붕이 시야에 낮게 들어오며 아담한 인상을 풍긴다. 현관을 통해 안쪽으로 들어서면 중정 너머로 주방과 다이닝룸이 있는 'ㄱ'자 형태의 본채가 나오는데 2층은 외부의 시선이 닿지 않는 집의 가장 안쪽에 올라서 있다. "많은 건축주가 내부 공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용적률(대지 면적에 대한 건물 연면적 비율)을 최대치로 활용해 2층을 올리고 지하를 파서 공간을 만들지요. 그런데 이 집은 소박하고 낮은 한옥을 만들고 싶다는 건축주 요청에 따라 집의 레벨을 낮추고 2층 공간을 최소화했어요. 2층이 있지만 단층 한옥의 소담스러운 분위기가 나는 이유죠."
대신 마당은 넓게 확보해 좁은 내부 공간의 답답함을 극복하고자 했다. 최 소장은 "내부 공간과 마당 사이에 한지 창이 있고, 마루가 있어 실생활에서 사실상 하나의 공간처럼 누리는 공간이 마당"이라며 "마당과 내부 공간의 조화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이뤄내느냐가 한옥 설계의 가장 중요한 키"라고 했다. 작은 정원수로 일부만 채우고 흙을 깔아 비워 놓은 마당은 건축주에게도 두고두고 만족도가 높은 공간. 특히 흙 마당은 집에 놀러오는 어린 손주들을 위해 실현하고 싶은 가장 이상적인 마당이었다고 한다. "한옥의 정취는 흙이 깔린 마당에서 나오는 게 아닌가 싶어요. 마루에 걸터앉아 있으면 거기에서 반사되는 빛과 공기가 참 따뜻합니다. 종일 흙과 돌을 만지며 즐거워하는 손주들을 보고 있노라면 한옥 짓기 참 잘했다 싶죠."
집의 인상을 결정짓는 별채의 누마루 역시 마당을 잘 즐기기 위한 수. 건축가에 따르면 누마루는 다락처럼 전망이 있는 궁궐이나 큰 한옥에 난간과 함께 설치하는 게 일반적인데 이 집은 단층 별채에 누마루를 만들고 난간을 없앴다. 문씨는 "전체적으로 단이 낮은 우리 집에 누마루를 설치하면 평상처럼 활용할 수 있겠다 싶었다"며 "만들어 놓고 보니 집 안에서 가장 아름답고 여유가 넘치는 공간이 됐다"며 흡족해했다. 평상 마루를 만들고 싶다는 아내의 요청은 건축가에게도 흥미롭게 느껴졌다. 텐들러 소장은 "별채 공간은 협소하지만 누마루로 연장돼 개방감이 상당하다"며 "접이식 문을 안마당을 향해 훤히 열 수 있어 내외부의 완충지대로써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다"고 했다. 부부는 실제 이 공간에서 손주의 돌잔치 같은 가족 행사를 치르기도 하고 바람 좋고 볕 좋은 날에는 부부와 손님들을 위한 야외 식사 공간으로도 쓴다.
기분 좋은 여유와 분주함이 있는 한옥살이
다정한집의 구석구석에는 부부의 취향과 관심사를 반영한 요소가 숨어 있다. 건축주와 대목이 완성한 한옥에 생기와 개성을 더하는, 작지만 빛나는 디테일이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한지 벽에 그려 넣은 동양화. 벽지 마감 단계에서부터 계획해 남편 정씨가 한지 벽에 손수 그림을 그려 넣었다고 한다. 그렇게 별채의 벽에는 화려한 꽃나무가, 본채 거실 벽에는 단아한 난초 그림이 영구 액자로 새겨졌다. 방과 거실에 놓인 목재 소가구들도 정씨가 직접 만들었다. 수년 전 시작한 목공예 솜씨가 발휘된 것. 한옥과 그림처럼 어우러지는 소품들은 동양적 무드를 좋아하는 아내가 꾸준히 사 모은 물건들이다. 처마 끝에는 수십 년 전 산사에서 구입한 풍경을 달고, 은은한 빛이 머무는 창가에는 언젠가 여행길에 구입한 티베트 싱잉볼을 무심하게 놓았다. "운명이란 게 있나 봐요. 취미생활로 틈틈이 익힌 동양화와 목공 작업, 소품들이 이렇게 유용하게 쓰일 줄 몰랐죠."
부부에게 한옥이란 우리 고유의 아름다움과 여유를 즐기면서 부부만의 이야기를 녹이고 취향대로 꾸며 나갈 수 있는 집이다. 이 유연한 공간에서 그들은 전에 알지 못했던 즐거움을 새롭게 경험하며 분주한 일상을 보내는 듯했다. 하루 일과가 은퇴 전보다 바쁘다는 정씨는 "한옥이 다 똑같겠거니 생각할 수 있지만 사는 사람에 따라 확확 달라지는 것이 한옥"이라며 "그만큼 관리하고 채워 나가야 할 부분이 많고 그래서 머릿속이 항상 분주하다"며 웃었다. 남편의 너스레에 아내는 "그래도 수십 년간 잊고 살던 자연과 이웃이 보인다. 방문을 열면 바로 자연을 만나고 대문을 나서면 이웃과 인사할 수 있으니 삶이 이보다 더 여유 있고 따뜻할 수가 없다"고 화답했다. 서울에서 가장 우수한 한옥으로 꼽힌 이 아름다운 집에는 그렇게 분주하고 여유로운, 부부만의 자적한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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