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장애진씨, '응급구조사'로 성장
'죽음의 골목'서 겨우 탈출한 임서형씨
"안전 사회" 계속 외쳐도 변한 건 없어
죄책감 이겨내고 "우리 목소리 내겠다"
참사의 고통은 같은 기억을 공유한 사람끼리 더 잘 아는 법이다. 여기 두 청년이 있다. 8년의 시차를 두고 끔찍한 재난의 한복판에서 살아나온 이들이다. 2014년 봄 장애진(26)씨는 차디찬 진도 앞바다에서, 2022년 가을 임서형(25ㆍ가명)씨는 아비규환의 이태원 골목길에서 가까스로 빠져 나왔다. 희생자 대부분이 10, 20대이고, 뭍에서든 바다에서든 안전 불감증에서 비롯된 사회적 참사라는 점에서 두 비극은 빼닮았다.
홀로 살아 돌아왔다는 자책감은 시간이 흘러도 20대 청춘의 몸과 마음을 짓누르고 있다. 세월호 9주기를 맞아 힘겹게 현재를 살아내고 있는 두 사람이 만났다. 긴 대화 끝에 도달한 결론은 사실 당연했다. 하지만 한국사회가 아직 세월호를 좀 더 입에 올려야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세월호 리본·이태원 별 배지가 하나로
“꼭 같이 달고 싶어서 가져왔어요.”
15일 오후 경기 안산시 단원구의 한 스튜디오. 임서형씨가 장애진씨에게 주황색과 보라색이 섞인 작은 별 모양의 배지 하나를 건넸다. 주황은 안전, 보라는 애도를 의미한다. 별 아래엔 ‘10ㆍ29’란 숫자가 표시돼 있다. 애진씨가 미소를 지으며 배지를 건네받아 가슴에 달고 있는 노란색 나비 배지 옆에 나란히 배치했다. 청년들의 대화를 문답식으로 재구성했다.
-요즘 어떻게 지내나요.
장애진(장): “수도권에 있는 한 종합병원 응급실에서 근무합니다. 응급구조사라는 직업인데, 생소한 분들이 많을 거예요. 심정지 환자에게 심폐소생술(CPR)을 실시하는 등 응급 상황에 맞춰 초기 대응을 합니다.”
세월호 참사는 애진씨의 꿈을 바꿨다. 안산 단원고에 다니며 원래 유아교육학과 진학을 염두에 뒀지만, 참사를 겪고 초기 대응의 중요성을 깨달아 진로를 틀었다. 지금도 종종 생존자들을 필사적으로 치료하던 응급구조사 얼굴이 떠오른다고 한다.
임서형(임): “언니는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저는 사고 직후 무기력하게 하루하루를 보냈어요. 얼마 전 대학을 졸업하고 친구들도 만나니 조금씩 괜찮아지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해요.”
스튜디오 한쪽 벽에선 세월호 참사 지점을 표시한 노란색 부표가 바다 위에 떠 있는 모습, 팽목항에 휘날리는 노란색 리본, 세월호가 옆으로 누워 인양되는 장면 등을 담은 영상이 재생됐다. 두 사람은 잠시 대화를 끊고 화면을 응시했다.
-2014년 4월 16일은 각자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나요.
장: “방송에서 ‘가만히 있으라’고 하길래 선내에 그대로 있었죠. 그런데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어요. 짐 가방과 캐비닛 위까지 올라갔는데 물이 종아리까지 차오르더라고요. 저쪽 끝에서 비명소리가 들리면서 갑자기 물이 들이닥쳤어요.”
그 뒤 탈출 과정은 잘 생각나지 않는다. 친구들의 탈출을 돕다가 자신도 어떤 친구의 손을 잡고 빠져나온 장면만 어렴풋이 머릿속에 맴돈다. 마치 필름 한 컷이 잘린 것처럼 기억이 날아갔다. 당시 서형씨는 고교 1학년이었다.
임: “교회에서 알고 지낸 오빠가 친구가 하늘나라로 갔다며 기도해달라고 했어요. 우리 또래가 많이 희생됐잖아요. 세월호 참사 후 상징 리본도 꼭 달고 다니고, 광화문 갈 때마다 분향소를 찾았습니다.”
"이태원 참사, 보고도 믿기지 않아"
-정확히 8년 6개월 뒤 이태원 참사가 터졌습니다.
임: “그렇게 많은 사람이 세상을 떠날 줄은 몰랐습니다. 내 몸부림으로 다른 이가 죽거나 다친 건 아닐까, 죄책감부터 들었어요.”
지난해 10월 29일 저녁, 서형씨는 이태원 세계음식문화거리에 있는 음식점에서 일행들과 식사를 하고 거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 인파에 섞여 혼자 ‘T자 골목’까지 떠밀렸다. 문득 ‘빠져 나가기 힘들겠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마스크까지 벗었지만 도무지 숨을 쉴 수 없었다. 순간 앞에 있는 여성이 쓰러졌고 좁은 골목은 곧 비명으로 뒤덮였다. 그는 해밀톤호텔 뒤편 주점 앞에 있던 경찰관의 도움으로 겨우 탈출했다.
장: “병원에서 일하다 속보를 봤어요. 이태원 골목에 셀 수 없는 사람이 누워 있고, 황급히 CPR을 하는 모습도 눈에 띄더라고요. 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나, 현실이 맞나 진짜 믿기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그날에..." 트라우마 불쑥
-참사 후 생긴 변화가 있습니까.
임: “아직 10월 29일에 갇혀 사는 것 같아요. 눈을 감을 때마다 생각나고, 술집이 많은 거리를 지날 땐 더 심해져요. 붐비는 지하철을 타거나 꽉 끼는 옷을 입을 때도 숨이 턱턱 막힙니다. 택시에서는 안전벨트 매는 것조차 압박처럼 느껴져 등쪽으로 돌려 매기도 했어요. 조금만 답답하다 싶으면 공포감이 몰려와 약을 먹으며 버티는 중입니다.”
장: “스스로 다른 친구들에 비해 트라우마(정신적 외상)가 덜하다고 판단했어요. 그러다 대학생 때 스킨스쿠버 다이빙 연습을 하는데, 문득 바다가 너무 어둡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직도 내가 힘들어하고 있구나’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또 일하면서 심정지 환자가 끝내 소생하지 못해 보호자를 만날 때마다 세월호 유족들이 떠올라요.”
-2차 가해도 적지 않았을 텐데요.
임: “이태원 생존자였던 고교생이 극단적 선택을 한 소식을 접하니 남일 같지가 않았어요. 그 친구가 생전 이태원 참사 영상에 댓글을 단 적이 있는데 그 아래 인신공격성 글이 줄줄이 달리더군요. 저에게 ‘너희 지원금은 우리 세금으로 나가느냐’고 묻는 지인도 있었습니다. 내가 원해서 당한 사고가 아닌데도 마치 이방인이 된 기분이었습니다.”
장: “세월호 참사 뒤에도 유족들의 단식 농성장에 극우 커뮤니티 회원들이 와서 피자를 시켜먹었잖아요. 2015년 특별조사위원회 청문회에선 해경 관계자가 ‘학생들이 철이 없어서 위험하다는 걸 못 느꼈다’는 발언도 했습니다. 2차 가해를 막을 수 있는 대책이 마련된다 한들 제대로 작동될지 의문이 들긴 합니다.”
"안전사회 만들어달라, 계속 말할 것"
공감은 치유의 버팀목이다. 애진씨는 2017년 1월 세월호 1,000일 추모제 이후 매년 공개 발언이나 편지 낭독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 8주기 때도 윤석열 대통령에게 “안전한 나라를 만들어 달라”고 호소했다. 그는 응급구조사로 바쁜 일상을 보내면서도 시간을 쪼개 가능하면 언론 인터뷰에 응한다. 이날도 인터뷰 직후 곧바로 야간 근무에 투입됐다. 서형씨도 올해 1월 새해 첫 이태원 참사 추모제에서 유족들에게 직접 작성한 육성 편지를 보냈다. 마음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기꺼이 취재진 앞에 섰다. “살아남은 이로서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다.
임: “바로 눈앞에서 쓰러진 그분을 자주 떠올려요. 제 증언이 그분과 가족에게 도움이 된다면 마다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얼마 전 세월호 유족들이 이태원 생존자 모임에 직접 만든 노란색 손수건을 보내오셨어요. 저보다 먼저 아픈 기억을 헤쳐 나가고 있는 분들과 손을 잡고 싶어요.”
장: “처음엔 제 이름 앞에 ‘생존자’라는 말이 붙는 게 싫었어요. ‘살아서 온 게 자랑이냐’는 손가락질도 있었죠. 그렇지만 참사를 없던 일로 할 수는 없잖아요. 목소리를 내면서 오히려 힘을 얻었습니다. 최소 10년은 싸워야겠다고 생각하고 시작한 일이에요. 할 수 있는 데까지 할 겁니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용기’를 말했다. 서형씨는 “저희와 비슷한 아픔을 겪는 사람들이 더 이상 생기지 않도록 언니처럼 계속해서 목소리를 내고 싶다”고 다짐했다. 애진씨가 서형씨를 다독이며 화답했다. “생존자로서 죄책감에선 벗어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우리 잘못은 아니라는 걸 꼭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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