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문화와 예술의 본질, 창조성에 집중할 때
경제학적 관점의 문화, 생산·소비 정부 지원 필요
지원 빌미로 독창성이라는 본질 침해돼선 안 돼
K콘텐츠, 차별화하려는 품질 경쟁의 성공 사례
수익성과 공공성의 이분법 넘어 창작 지원해야
편집자주
주로 수치로 묘사되는 경제학은 추상적인 사회과학의 영역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삶으로 결국 구현되는 것은 경제 현상이라고 다르지 않겠죠. 경제 분야 대표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연구원들이 문학과 역사학, 철학에 등장하는 경제 이야기를 소개하는 ‘인문학 속 경제’를 3주에 한 번씩 화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얼마 전 음악계의 거장 사카모토 류이치가 세상을 떠났다. 필자는 어린 시절 ‘Rain’, ‘메리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와 같이 격정적인 영화 삽입곡을 통해 그를 처음 알게 됐다. 한창 인생이 쉽지 않다고 생각했던 시절 ‘Aqua’나 ‘Amore’와 같은 피아노곡을 통해 위로를 받았으며, 우리나라 래퍼 MC스나이퍼와 협업했던 ‘Undercooled’, 오키나와 음악을 전자음악과 함께 재해석한 ‘Neo Geo’를 들으며 선을 넘나드는 창조의 쾌감과 다른 것에 대한 존중을 배웠다. 그리고 깊은 울림을 남겼던 영화 ‘남한산성’의 음악을 들으며, 역사 속 개인이 짊어지는 삶의 무게를,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는 위로를 느꼈다. 그의 일생을 보며 한 사람의 창조성이 세상에 얼마나 큰 영감과 위로, 그리고 용기를 줄 수 있는지 감탄하고 또 감사하게 된다. 그리고 그 창조성이 언제 어떻게 그 씨앗이 발아하고 성장하며, 구체적인 결과물로 이어지는지 자연스레 궁금해진다.
문화라는 것을 경제학적으로 설명할 때 가장 많이 등장하는 개념으로 가치재(merit good)와 비용질병(cost disease)을 들 수 있다. 가치재는 사회적으로 가치가 있으나 시장에서는 충분히 공급될 수 없는 재화, 즉 외부성의 영향을 받는 것들을 일컫는다. 이는 공공재(public good)와 비슷한 개념이기는 하나,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소비자들은 장기적으로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줄 문화의 진정한 가치를 미처 인식하기 어려울 수 있으므로 정부가 소비를 적극적으로 도울 필요가 있다는 온정주의적 관점을 기저에 깔고 있다. 비용질병이란, 오케스트라나 미술작품과 같이 예술작품의 생산에는 물리적 한계가 있고 이들의 인건비는 지속해서 상승하므로 산업으로서 생산성이 증가하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이 역시 자연스럽게 정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논리로 연결된다.
근대적인 정부조직 및 기능이 생겨나기 전에는 문화예술이 소수의 귀족 후원자들에게 의존했다. 예술은 비용이 많이 들어 가격이 비쌀 수밖에 없으므로, 이를 감당 가능한 사람들의 고상한 취향, 그리고 그들이 사랑한 미술과 음악을 동상이나 연주회 등을 통해 많은 사람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그들의 선의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누군가의 지원에 기댄다는 것은 예술적 창조성에 제한이 걸릴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중세 예술이 후원에 의존하던 시절, 주문자의 의도대로 그림을 그리지 않아서 곤경에 처한 파올로 베로네제의 일화는 잘 알려진 사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인류사에서 손꼽히는 천재이면서도 완성한 작품이 두 자리 숫자에 불과한데, 후원자들은 이를 기다릴 수 없었기에 그에게는 합당한 후원이 주어진 바 없다.
정부와 기업이 후원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오늘날, 우리는 이들의 지원이 창조성을 제약하는 사례들을 알고 있다. 공공은 문화예술에는 수익이나 시장과 같은 개념을 내세우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산업적 가능성을 보고 정부는 기업과 함께 특정 문화기술에 대대적 투자를 하겠다고 한다. 지원과 동시에 이미 방향 설정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문화예술의 역사를 연구한 경제학자들은 수익성이든 공공성이든, 단기적인 정책 요소가 아니라 시장과 기술의 변화가 근본적인 변화의 동력임을 역설한다. 대표적으로, 데이비드 갤런슨(David Galenson)은 소수의 권력자가 지배하는 수요독점의 시장에서 많은 사람에 의해 문화예술이 향유되고 평가받는 경쟁적 시장으로의 진화가 새로운 예술을 만들어낸 원동력이라고 주장한다. 수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클로드 모네와 같은 인상파 작가들은 19세기 후반의 지배적인 유통망이었던 살롱으로부터 외면받았으나, 다른 시각을 가진 개인 갤러리들을 통해 데뷔하고 인정받기 시작했다. 이러한 흐름은 20세기 들어 가속화되어 파블로 피카소, 마르셀 뒤샹, 앤디 워홀, 장-미셸 바스키아 등 특정한 사조와 표현법, 미술의 양식을 거부하며 인간의 표현을 확장해나간 예술가들이 등장할 수 있었다.
기술의 변화 역시 다수에 의해 평가받는 시장으로의 전환을 가속했다. 경제사학자 거벤 바커(Gerben Bakker)는 20세기 초 영화의 의미에 주목한다. 이로 인해 현장에 가야만 양질의 공연을 볼 수 있었던 환경이 언제 어디서든 관람할 수 있는 환경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 부유한 사람들이 밀집해 사는 곳에서만 공연을 개최할 필요가 없게 됐으며, 시장의 크기가 커짐에 따라 작품이 흥행할 경우 천문학적 수익을 거둘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이 가능성을 보고 많은 스튜디오가 서로 차별화하려는 품질 경쟁(quality race)에 뛰어들어 다양한 작품들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는 할리우드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넷플릭스와 같은 글로벌 플랫폼에서 한국 콘텐츠가 거둔 성공을 알고 있다. 기술이 어떻게 시장을 확대하고 다양성을 증가시키는지 보여주는 가장 친숙한 사례 중 하나다.
지금까지 설명한 다양한 역사적 연구들은 문화예술 수요의 다양성이 창조의 다양성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공공과 정부가 수행해야 하는 역할 역시 자연스럽게 정의된다. 과거와 같은 산업 발전이나 복지정책을 모델로 삼아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들이 지속적으로 더 깊은 취향을 형성하는 것을, 다양한 작품이 만들어지는 것을 장기적으로 돕는 것이다. 청년이기 때문에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피드백을 받고 더 나아질 수 있기 때문에 지원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독창성을 추구하고 평가하는 사회로의 전환을 이끌어야 한다.
경제학자 카롤 보로위츠키(Karol Borowiecki)는 클래식 음악을 대상으로 창조성이 구현되는 과정을 빅데이터 기법을 활용해 연구했는데, 독창성이 높은 작품일수록 후대에 미치는 영향력이 높다는 것을 확인했으며, 좋은 스승이 있을 때 모방의 과정을 거쳐 결국 독창성 높은 작품을 쓸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밝혔다. 그리고 사람들 간의 교류가 창조성을 촉진한다는, 당연해 보이지만 엄밀하게 증명된 바가 없던 사실들을 확인한다.
우리는 창조성이 발현되는 이 과정에 부합하는 제도와 환경을 가지고 있을까? 우리는 성공적인 추격자였던 시대를 지나 선도자가 돼야 하는 시기를 살고 있지만, 문화와 예술, 창조성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있다. 독창적 시도는 전례가 없다거나, 행정의 안정성을 저해한다는 등의 이유로 제약을 당하는 경우가 많으며, 창조의 과정보다는 이미 증명된 결과에 관심이 쏠린다. 물론 우리는 개인으로서만 일할 수 없고, 규칙과 제도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 궁극적 목표는 창조적 시도를 장려하되 불완전성을 체계적으로 보완해 구체적 성과를 만들어내는 것이지, 창조적 시도 자체를 제약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이것이 바뀌길 기대하기란 쉽지 않다. 지원을 빌미로 독창성이라는 본질이 침해당하는 것 역시 좋은 방향은 아닐 것이다. 결국 기존의 체제하에서 새로운 길을 내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역설적으로 문화와 예술이 가지는 힘을 확인한다. 창조성은 이전과 다른 데서 오는 불편함을 마주할 용기를 갖는 힘이 필요하기에, 불편한 질문을 던지고 새로운 방식으로 답한 그들을 보며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재해석하고 기존과 다른 방식의 길을 모색할 에너지와 아이디어를 얻기 때문이다.
역사학자 데이비드 나이(David Nye)는 포드 자동차의 흥망사를 다루며 그 성공의 요인이자 실패의 원인을 이렇게 설명했다.
“조립라인은 최종 결과가 아니라 지속되는 문화적 과정의 일부였다…. 포드는 당면한 문제를 풀기 위해 현장 엔지니어들과 계속 소통했다…. 그들은 위대한 이상을 가졌지만, 목표 달성을 위해 특정한 목표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포드의 유연한 사고와 진취적 정신은 사라지고 ‘조립라인’이라는 형체, 그와 연계된 제도, 그것만을 답으로 생각하는 인식만이 남았다. 그렇게, 미국 자동차 산업은 시대 변화에 대응하지 못한 채 예정된 실패의 길을 안전하게 걸어갔다. 우리는 다를까? 쇠락도시의 재생을 꿈꾸는 여러 사람들은 빌바오의 고민이 아니라 구겐하임 미술관의 건물에 여전히 초점을 맞춘다.
같은 실패를 겪지 않으려면, 다시금 그 본질에 집중하여 독창적인 것의 가치를 조명하고, 결과뿐 아니라 그 과정을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 문화예술은 그 본질과 탐구의 과정에 대한 이해를 넓혀준다. 그래서 그토록 가치 있는 영감을 우리에게 주는 사람들, 독창성과 영향력을 만들어내는 작가와 감독, 배우들이 인정받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 기다리지 않을 수 있는 세상으로 조금씩 나아가기를 희망한다.
이창근 KDI국제정책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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