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풍경화의 거장, 겸재와 터너를 발견한 안목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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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유명한 예술작품도 나에게 의미가 없다면 텅 빈 감상에 그칩니다. 한 장의 그림이 한 사람의 삶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맛있게 그림보기는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그림 이야기입니다. 미술교육자 송주영이 안내합니다.
1751년 한양: 인왕제색도의 탄생
1751년 7월, 조선 한양 인왕곡에 장맛비가 일주일째 내리고 있다. “이놈의 비! 언제 그칠꼬!” 75세의 백발노인이 사랑채에 누워 밖을 보며 한숨을 짓는다. 금강산 일만이천봉을 세 번이나 넘나들었던 청춘의 기력은 스러졌지만 노인은 여전히 좀이 쑤신다. 산과 들, 바다로 쏘다니고 싶은 마음은 주름지지 않는다. 눈을 감고 빗소리를 들으니 금강산 만폭동 폭포 소리 같고 암벽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 같구나 하다가 잠이 든 노인을 깨우는 행랑아범의 한마디. “어르신! 나와보세요! 비가 그쳤어요!” 노인은 서둘러 집 앞에 서서 인왕산을 바라보았다. “아범, 붓을 가져오게! 저 산이 얼굴을 바꾸었구나. 내 기다리던 얼굴이로다!” 붓을 눕혀 한 번에 내려 긋자 물기 머금은 검은 바위가 고개를 내밀고, 햇살에 반짝이는 안개가 피어오른다. 1751년 7월 17일(음력 5월 25일) 오후, 대한민국 국보 제216호 ‘인왕제색도’가 그렇게 태어났다.
1842년 영국: 눈폭풍의 탄생
다시 100년 후, 1842년 영국 하리치 해안가, 눈폭풍이 치는 겨울 바다 배 위에서 67세 노인이 소리친다. “이보게! 내 몸을 밧줄로 묶어주게!” 젊은 선원은 그러다가 진짜 죽을지도 모른다며 말렸지만 노인은 이미 밧줄을 자기 몸에 감고 있다. 거대한 자기장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출렁이는 배에 4시간이나 묶여 있던 그는 바다를 노려보며 소리친다. “내가 본 그대로 이 폭풍우를 그릴 것이야! 여기서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뭍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는 손에 붓과 나이프를 쥐고 색을 칠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제목을 쓴다. “눈폭풍-얕은 바다에서 신호를 보내며 유도등에 따라 항구를 떠나가는 증기선. 나는 에어리얼호가 하리치 항구를 떠나던 밤의 폭풍우 속에 있었다.” 노인은 영국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 윌리엄 터너다. 19세기를 대표하는 미술평론가 존 러스킨이 “바다의 움직임, 안개, 빛을 캔버스에 담아낸 가장 웅장한 작품”이라고 찬사했던 터너의 ‘눈폭풍’이 그렇게 태어났다.
1925년 금강산: 독일인 신부의 조선 화첩
다시 100년 후, 1925년 6월 일제강점기의 조선이다. 금강산 부근 일본인 소유의 호텔로 한 독일인이 들어선다. 14년 만에 다시 조선을 방문한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가 이제 막 금강산 유람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다. 금강산의 비구니들을 보며 수행자로서 감동하고 구룡폭포 앞에서 신의 창조를 찬양하며 숙련된 화가로서 그린 풍경화를 안고 돌아오는 길이다. 호텔 로비에서 일본인 화가가 자신의 금강산 그림을 전시하며 판매하고 있었다. 베버 신부는 그림들이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실적이지 않고 양식적이군” 그렇게 중얼거리며 나가려는데 구석에 있던 그림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베버 신부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이때의 감동을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 조선 화가는 계곡과 깊은 골짜기에 감춰져 벼랑이나 봉우리에서 볼 수 있는 크고 작은 절과 암자들을 빼놓지 않았다. 정양사의 육각약사전, 삼불암, 보덕굴 등 그는 분명 가능한 한 모든 사찰들의 특징을 그리려고 했다. 그가 금강산을 그리는 한국적 조형 방식은 금강산 전체의 특성을 재현해 내고 있었다. 나는 일본화가의 구룡폭포 대신 한국화가의 구룡폭포를, 일본화가의 '만물상도' 대신 한국인들이 즐겨 입는 색동옷 같은 금강내산전도를 선택하려 한다." 일본인 소유가 될 뻔했던 정선의 화첩은 그렇게 베버 신부와 함께 독일의 오틸리엔 수도원으로 옮겨졌다.
2023년 서울: 풍경화의 역사를 바꾼 윌리엄 터너
다시 100년 후, 2023년 대한민국 서울이다. 컴퓨터 모니터로 터너의 그림을 보던 나는 가슴이 뛰고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미술을 전공하는 고등학생 딸이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이 그림 어느 시대 그림 같아?” 딸아이는 “오른쪽에 저거 뭐죠? 그런데 이거 나이프(knife)로 그렸네. 요즘 작품 같은데?” 나는 180년 전 영국의 터너가 산업혁명을 상징하는 증기기관차를 그린 그림이라고 알려주었다. 깜짝 놀라 눈이 동그래진 딸의 말, “대박! 천재네!”
터너의 그림은 ‘이발소 그림’에서 출발했다. 아무 데나 걸리는 싸구려 그림을 흔히들 ‘이발소 그림’이라고 부르지만 어린 터너의 그림은 문자 그대로 이발소의 그림이었다. 터너의 아버지는 이발사였다. 마치 스포츠 영재에게 올인하는 요즘 아버지들처럼 그는 미술영재 아들을 보필했다. 어린 아들의 그림을 이발소 벽에 걸어두고 신사들의 비위를 맞춰가며 홍보하던 끝에 터너는 14세에 영국 왕립아카데미에 입학했다. 터너는 화가이자 과학자였다. 그가 출퇴근하던 아카데미 건물에는 화가, 음악가, 과학자들이 섞여 있었다. 이제 막 시작된 영국의 산업혁명, 과학혁명을 이끌던 지성인들은 미래에 대한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그들 사이에 터너가 있었다. 그는 모든 과학 강연회를 쫓아다니는 과학 마니아였고 특히 기상학과 지질학에 관심이 많았다. 그런 이유로 터너는 기상학, 지질학, 기계공학 연구자들의 논문에 자주 등장한다. 터너는 평생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았다. 실제로는 두 딸을 두었지만 단 한 번도 같이 살지 않았다. 그는 방언도 심하고 발성도 나빠서 교수로 재직할 때부터 인기도 없었다. 자연스레 사람을 멀리하고 혼자 작은 스케치북을 들고 평생 여행하며 그림만 그렸다. 15세에 구상, 즉 소묘를 완성했고 30세에 수채화를 완성했고 40세에 유화를 완성했다. 그랬던 그가 60대 중반에 자신의 몸을 배에 묶고 눈폭풍이 직접 경험하며 그려낸 그림으로 풍경화의 역사를 바꾸었다. 69세에는 현대미술작품으로 보일 만큼 추상성이 엿보이는 '비, 증기 그리고 속도'를 완성했다.
풍경화를 두고 누가 쉬운 이발소 그림 같다고 하는가? 풍경화야말로 자연을 탐구하는 가장 어려운 예술 중 하나다. 서양미술사에서 풍경화는 비교적 늦게 출현했고 오랫동안 평가절하되었다. 터너의 풍경화를 당시 사람들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오늘날 터너가 영국의 국민화가가 된 배경에는 러스킨의 안목이 큰 역할을 했다.
조선의 한류 아티스트, 겸재 정선
동양의 풍경화는 서양과 달랐다. 동양미술에서 풍경화는 곧 산수화다. 4세기경 육조시대에 이미 산수화 이론이 정리되었고 사실적인 북종화와 사유적인 남종화로 이어지다가 10세기 이후 남종화풍 산수화가 문인화로 성장하였다. 이러한 중국 산수화의 전통은 고려와 조선에도 이어졌다. 조선 초기 안견과 조속이 유명하지만 이들은 직업 화가로서 북종화의 전통을 따랐다. 이렇듯 산수화는 시각적 공간, 형태, 색채 등을 실험하는 장르가 아니었다. 정해진 전통 방식대로 묘사해야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직업화가가 아닌 문인들에게는 취미로 하는 수련이었다. 그랬던 산수화 전통을 깨고 남다른 실험과 도전을 했던 사람이 있었다. 바로 조선 영조가 사랑했던 겸재 정선이다.
정선은 화원이 될 수 없는 양반이었다. 그러나 어떤 화원보다 많은 그림을 그렸던 화가다. 영국의 터너와 마찬가지로 겸재는 평생 종이와 붓을 들고 전국을 여행하며 풍경을 그렸다. 명의 멸망, 호란과 왜란을 겪은 조선 문인들은 새로운 자의식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한 풍토 속에서 우리 산천을 직접 보고 그리는 실경(實景)과 그 속에 철학적인 의미를 담은 의경(意景)이 합쳐지는, 즉 사실적인 북종화와 사유적인 남종화가 하나로 합쳐지는 ‘진경(眞景)산수화’가 등장했다. 진경산수의 의미나 정의는 학자마다 다소 이견이 있지만 겸재가 엄청난 인기를 누리며 “사용한 붓이 무덤을 이룰 정도”였음은 분명하다. 중국 사람들이 서로 그의 그림을 구하려고 법석이었다. 그의 그림 한 장 값이 중국 1급 화원의 연봉과 같았다고 하니 K-미술의 원조라 해도 말은 될 듯하다. 그러나 마음고생도 있었다. 1754년 영조가 78세의 겸재에게 종4품을 하사하자 “천한 기술로 유명해졌다고 이런 벼슬을 내리는 것을 옳지 않다”는 상소가 올라왔다. 주문이 많아서 너무 대충 그린다는 비난도 있었다. 현재에도 겸재를 의심하는 시선은 있으나 인왕산과 금강산을 직접 본 사람이라면 “실제 같으나 더 고혹적인 풍경” 앞에 결국 감탄한다. 특히 겸재가 남긴 금강산 풍경은 현대적 인포그래픽(정보를 시각적으로 알아보기 쉽게 디자인한 그림) 지도라 해도 손색이 없다. 금강산을 직접 봤던 베버 신부가 사재를 털어서 화첩을 구매했던 이유일 것이다.
독일 오틸리엔 수도원에 잠들어 있던 겸재화첩은 1975년에 미술사학자 유준영 교수로 인해 세상에 알려졌다. 2000년에 미국의 미술사학자 케이 블랙이 '금강내산전도'를 인공위성 사진과 비교하며 감탄했던 논문이 실린 후 뉴욕 크리스티의 직원이 수도원에 찾아와 “50억을 줄 테니 겸재의 그림을 달라”고 했다. 그러나 수도원은 거절했다. 이후 수도원장과 선지훈 신부의 노력으로 마침내 2005년, 수도원은 겸재화첩을 한국 베네딕토 왜관 수도원에 영구임대 조건으로 무료 반환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겸재화첩은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공감과 애정이 있는 안목은 시공을 초월한다
베버 신부는 1925년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라는 영화를 제작하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한국인들이 정진한다면 본래 누렸던 문화 수준으로 다시 올라갈 것이다. 동방의 민족 중 그저 작은 한자리가 아니라 의미 있는 위상을 확보할 것이라 믿는다.” 대한민국의 ‘K-컬처’가 전 세계에 통할 것임을 이미 알았던 베버 신부의 안목은 이러한 공감과 연민, 깊은 애정에서 시작되었다. 풍경화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자연에 대한 세계관, 그림도구의 발명과 이동수단의 발달, 동양화의 산수화 이론까지 적지 않은 공부가 필요하지만 이 모든 것을 몰라도 상관없다. ‘개인취향 존중’을 외치며 함부로 호불호를 판단하는 요즘 시대라지만 취향을 넘는 안목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것은 공감과 애정으로 통찰한 ‘보편성’이다. 인상주의와 추상미술이 없던 시대에 터너를 알아 본 러스킨의 안목, 그리고 진경산수화를 전혀 몰랐지만 정선을 알아 본 베버 신부의 안목은 300년 동안 동서양을 넘나들며 돌고 돌아 지금 여기, 나와 당신에게 닿아 다시 감동으로 이어지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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