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리 '달리는 무릎' (문학웹진 림)
편집자주
단편소설은 한국 문학의 최전선입니다. 하지만 책으로 묶여 나오기 전까지 널리 읽히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한국일보는 '이 단편소설 아시나요?(이단아)' 코너를 통해 흥미로운 단편소설을 소개해드립니다.
"무슨 이유로 태어나 어디서부터 왔는지…의도치 않은 사고와 우연했던 먼지덩어린 별의 조각이 되어서 여기 온 거겠지." 가수 윤하의 '별의 조각'을 듣다가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정말 우주적 존재인 건가. 과학적으론 그렇다. 별의 폭발로 흩뿌려진 물질들이 신체를 이루고 있으니까. 우연에 우연을 거듭해 지금 이 순간을 산다는 건 대단한 일이 분명하다.
그런데 현실을 살다 보면 종종 이런 생각도 한다. '대단한' 존재가 이다지도 쓸모가 없어도 되는 건가. 내일을 알 수 없는 청춘에 유독 많이들 하는 고민이기도 하다. 문학웹진 '림(LIM)'에 연재된 이유리의 '달리는 무릎'은 그 감정을 기발한 상상력으로 산뜻하게 그린 단편소설이다.
화자인 '나'는 세 달째 집 근처 창릉천에서 새벽 달리기를 한다.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침대에 누우면 "천장이 그대로 불안이 되어 내 얼굴로 쏟아져 내리"는 걸 피해보려고.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할까, 군무원이나 간호조무사를 준비해볼까, 부모님 말대로 고향에 내려갈까를 매번 고민하는 게 일과처럼 됐다.
그러다 크게 넘어진 날 우연한 만남이 이뤄졌다. '나'는 오른쪽 무릎뼈가 보일 정도로 다쳤다. 혹시 이물질이 몸속에 남았는지를 확인하려면 큰 병원에서 엑스레이를 찍어야 했지만 더 고통을 견딜 수 없어 빨리 꿰매기로 했다. 귀가 후 까무룩 잠들었다 눈을 뜨니 고통은 심했다. 한 달은 무릎을 쓸 수 없어 아르바이트도 못 하는 상황에 떠오른 바닥난 통장 잔고도 또 다른 고통의 원인이었다. 그때 깁스 안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안 아프게 해줄까." 생각할 겨를도 없이 '네'라고 답한 순간 거짓말처럼 무릎이 제대로 움직였다. "나는 너를 내내 기다렸다고. 너 같은 사람을." 그 목소리가 말한다.
'목소리'는 거래를 제안한다. 무릎을 낫게 해주는 대신 달리기를 하라는 조건이다. 그 운동에너지를 흡수한 자신이 지구 중력을 벗어날 수만 있으면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우주 탄생 이전의 존재다. 영속에 가까운 생을 누리던 이들이 공간이 비좁아지자 "공동체에 가장 도움이 되지 않는 이"를 선별하는 투표에서 뽑힌 이들 중 하나다. 공동체의 공간 확보를 위해서 빅뱅이 일어나는 순간 선별된 자들은 육체를 빼앗기고 무한대에 가까운 조각으로 쪼개져 우주 전체에 흩뿌려졌다. 사연을 듣고 '나'는 하루에 두 시간씩 창릉천을 뛰기로 한다.
통증의 완화와 달리기 간의 거래 성사는 단순히 조건이 맞아서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화자의 결심은 '감정'에서 비롯한다. 목소리만 남은 외계인에게서 자신의 처지를 인식한 '나'는 따져 묻는다. 도대체 선별 기준이 뭐냐고. "이 세계에선 내가 가장 먼저 떨려나갈 사람"이라는 불안감에서 비롯한 분노다. 이 사회에서 부유하고 있다고 느끼는 소외된 자의 감정이다.
'나'에게 달리기는 이제 일종의 응원이다. 외계인을 향한, 그를 닮은 본인을 위한. "가고 싶은 곳조차 없"던 삶에서 뭐든 해보자는 마음이 꿈틀거린다. 그런 '나'를 위해 달리고 싶다. 우주적 존재의 쓸모를 누구도 쉽게 판단할 수는 없다는 믿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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