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수치-방대하지만 단일하지 않은 성폭력'의 역사
"청바지를 입은 여성은 강간 피해를 당했다고 주장할 수 없다."
1992년 청바지를 즐겨 입는 남부 이탈리아의 열여덟 살 학생 P.R.은 운전을 배우던 중 강사 카르미네 크리스티아노에게 강간을 당했다. 크리스티아노는 재판에 넘겨져 징역 2년 10개월을 선고받았다. 7년 뒤 로마 대법원은 판결을 뒤집고 가해자의 손을 들어줬다. "청바지는 입고 있는 사람이 적극 협조하지 않으면 벗기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상호 합의한 것이 틀림없다"는 황당한 논리였다.
런던대 역사학 교수인 조애나 버크는 저서 '수치'에서 전세계에 만연한 성폭력의 역사를 짚었다. 이탈리아 대법원의 판결을 비롯해 부부 강간을 '가정 내 사적 문제'로 보던 남부 오스트레일리아, 아직도 '위안부' 문제를 인정하지 않는 일본 정부와 이를 눈감아 준 한국 정부, 동성애자 등 성적으로 취약한 이들에 대한 강간 사례까지 끝도 없이 열거된다.
이 끔찍한 재앙에서 왜 수치는 늘 피해자의 몫이어야 했나. 그 사회의 어떤 이데올로기적·정치적·법적·현실적 요인이 피해자가 목소리를 내고 고통을 인정받지 못하게 하는가. 이런 저자의 질문을 따라 '방대하지만 단일하지 않은' 전 지구적 성폭력에 대한 이해를 넓혀가는 동안 독자는 실상을 직면하고 비로소 이 현실을 전복할 수 있는 방법을 상상하게 된다. '청바지 강간 불가론'의 반전처럼 말이다.
이탈리아 대법원의 판결에 분노한 정치인과 페미니스트들은 '정의를 위한 국제 청바지의 날'을 발족해 투쟁했고, 로마 대법원은 2008년 청바지를 입은 열여섯 살 소녀를 성폭행한 사건에 대한 유죄판결로 결국 '청바지 변론'을 철회한다. 이제는 그 누구도 청바지를 정조대에 비교할 수 없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