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에서 당직자 생활을 25년쯤 한 사람이 들려준 말. “YS, DJ 시절에는 총재가 당의 왕이었다. 참여정부 때는 당대표보다는 국회의원들이 실권을 가졌다. 그러다 문재인 정부 이후로는 열성 당원들이 당의 진짜 주인이 됐다.”
이런 열성 당원들이 주도하는 팬덤 정치는 이제 양념이 아닌 정치권의 주류가 됐다. 연예인 팬덤과는 반대로 강성 지지자들이 갑이고 국회의원은 을이다. 팬층이 두껍다는 이재명 대표도 별 수 없다. 그가 지지자들에게 "비이재명계 정치인들에 대한 인신공격을 멈춰 달라"고 부탁하면 지지자들은 "이재명이 변했다"고 말한다.
이들의 활동은 문자 폭탄 보내기에 머물지 않는다. 온라인 커뮤니티 활동을 통해 축적된 경험과 집단 지성을 발휘해 국회의원들의 급소를 효과적으로 공략한다. 특히 내년 총선을 앞두고 을이 될 수밖에 없는 의원들의 처지를 십분 활용한다. 마음에 들지 않는 당내 ‘수박’(겉과 속이 다르다는 의미로 비이재명계 의원들을 가리키는 멸칭) 의원들을 압박하기 위해 그들의 지역구에 출마하려는 친이재명계 정치인을 조직적으로 밀어준다. 공천에서 떨어뜨려야 할 수박 의원 명단을 만들어 돌린다. 영향력 극대화를 위해 룰 개정에도 관여한다. 공천 심사와 직결되는 선출직 공직자 평가 등에 당원 평가 비중이 확대되도록 목소리를 키운다.
그래서 국회의원들이 불쌍하다는 말은 아니다. 이미 적잖은 의원들은 달라진 생태계에 빠르게 적응해 강성 지지층을 정치 수명 연장에 활용하기도 한다. 페이스북에 '당원 권리가 확대돼야 한다'고 자주 아부하는 정치인이라면 열의 아홉은 이런 경우이다.
진짜 피해자는 따로 있다. 강성 지지자들이 과잉 대표 되는 사이 정치권 관심사에서 상대적으로 밀려나는 평범한 시민들이다. 생업이 바빠서 국회의원에게 집요하게 영향력을 행사할 시간과 여유가 없는 이들은 같은 세금을 내고도 이등시민 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여야의 극심한 대치도 강성 지지자 문제와 맞닿아 있다. 강성 지지자들은 협치와 중도층 여론을 중시하는 온건파 의원들을 수박이라고 부르며 괴롭힌다. 정치 공세에 앞장서는 싸움닭 강경파 의원들을 좋아한다. 국민의힘 강성 지지층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조직적인 표 몰아주기로 국민의힘과 민주당 지도부는 다수가 강경파로 채워졌다. 그 결과 국회는 상대 진영을 때리기 바쁜 싸움터로 변질됐다. 시민들의 삶의 문제를 섬세한 손길로 다루고 미래 세대를 위해 통 크게 합심하는 좋은 정치는 설 자리를 잃었다. 이등시민은 이렇게 손해를 본다.
강성 지지자들이 나쁜 사람은 아닐 것이다. 나름의 정의감과 역사의식에 근거해 뜨겁게 사는 사람들일 것이다. 문제는 이들이 투표로 심판할 수도, 견제할 수도 없어서 정치적 책임을 전혀 지울 수 없는 익명의 집단이라는 점이다. 그럼에도 집요함과 정보통신기술(ICT) 발전에 힘입어 그 영향력이 나날이 커져간다. 책임지지 않는 권력은 위험하다. 더 좋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으로 모였을 강성 지지자들이 역설적으로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는 진단이 나오는 이유이다. 이들의 득세가 자칫 시민 참여에 대한 환멸과 엘리트 지배를 향한 향수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일각의 목소리가 괜한 걱정으로 들리지 않는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