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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커플은 반드시 아기를 낳아야 하는 연애 리얼리티 쇼가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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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커플은 반드시 아기를 낳아야 하는 연애 리얼리티 쇼가 있다면…

입력
2023.04.28 04:30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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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영 신작 장편소설 '허니비'
도피성 우주 이주 이후 지구에 남은 이들
인간-클론 공존 속 자연임신을 향한 욕망
계급 차별·관음증적 미디어 등 현실 투영

소설 제목 '허니비'는 연애 방송프로그램의 이름이다. 실제 인기 방송 형식들을 차용했지만 자연 임신·출산을 목표로 한다는 설정이 독특하다. 연애 프로그램 '에덴'의 한 장면. IHQ 캡처

소설 제목 '허니비'는 연애 방송프로그램의 이름이다. 실제 인기 방송 형식들을 차용했지만 자연 임신·출산을 목표로 한다는 설정이 독특하다. 연애 프로그램 '에덴'의 한 장면. IHQ 캡처

2399년 최고 인기 방송 프로그램인 '허니비'. 남녀 각각 4명이 한 숙소에 모여 지내면서 짝을 찾는 연애 리얼리티쇼다. 색다른 점은 최종 커플이 되면 반드시 아이를 낳아 키워야 한다는 것. 최상의 환경에서 아이를 키울 수 있도록 재정적 지원을 톡톡히 받는 대신 전 육아과정을 시청자와 공유해야 한다. 실상 '훌륭한' 부모감을 뽑아 아기를 탄생시키는 쇼다. 세트장이 벌집 모양 육각형 인 쇼의 출연자들은 생산의 의무가 있는 꿀벌(허니비)을 상징한다. 스스로를 대부(代父)·대모(代母)라 생각하며 아기방 벽지 색깔까지 참견하는 시청자들의 '사랑'이 프로그램의 원동력이다.

이런 방송은 어떻게 탄생할 수 있었나. 장편소설 '허니비'는 그 배경을 이렇게 설명한다. 22세기 말 황폐화된 지구를 떠나는 대규모 이주 후 지구에 남은, 혹은 남겨진 이들은 그들만의 삶을 버텨 나간다. 인구수가 줄자 지구는 오히려 푸른빛을 조금씩 되찾는 반면 대부분 인간은 난임 상태다. 클론(복제 인간) 아기 입양이 보편화되자 역설적이게도 이성애 유성 생식을 기반으로 한 '자연임신'을 꿈꾸는 이들을 대리만족시켜주는 '허니비'는 하나의 사회 현상이 된다.

2013년 큐빅노트 단편소설 공모전에 '파경'으로 입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박문영 작가는 이번에도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배경으로 인류 공존에 대한 고민을 충실히 담았다. 소설 세계에는 우리 사회의 모순이 투영돼 있다. SF어워드 수상작인 '사마귀의 나라'(2015·중단편 부문 대상), '지상의 여자들'(2019·장편 부문 우수상)에서 보여줬던 부조리에 대한 저자의 날카로운 시선에 허니비라는 흥미로운 상상력이 절묘하게 더해졌다.

은행나무 출판사는 젊은 작가들의 중편소설 시리즈(노벨라)에 이어 장편소설선(N°)을 선보였다. 그 시작으로 박문영의 '허니비'와 장진영의 '취미는 사생활', 황모과의 '서브플롯' 등 신작 3종을 동시 출간했다. 은행나무 제공

은행나무 출판사는 젊은 작가들의 중편소설 시리즈(노벨라)에 이어 장편소설선(N°)을 선보였다. 그 시작으로 박문영의 '허니비'와 장진영의 '취미는 사생활', 황모과의 '서브플롯' 등 신작 3종을 동시 출간했다. 은행나무 제공

소설을 이끌어 가는 인물은 '조율'·'조화' 쌍둥이 자매. 이들은 '버리지 말자. 사지 말자. 만들지 말자'라는 수칙을 가진 도심 밖 빈민가(게토) '제로'에 산다. 조화의 예기치 못한 임신은 자매의 일상을 흔든다. '만들지 말자'라는 수칙에는 인간도 포함이라서다. 제로 안에서 아기를 낳아 기를 수 없는 조화는 조율에게 허니비 출연을 부탁한다. 평소 허니비를 혐오했던 조율이지만 결국 소꿉친구인 '마모루'와 출연을 결심한다. 서로 모르는 척 위장한 후 최종 커플이 돼 조화의 아기를 몰래 데려와 키우는 게 이들의 계획이다.

여기에 자신이 클론임을 숨기고 출연한 '레아'까지 얽히면서 갈등은 고조된다. 자신이 클론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힘들었던 레아는, 인간은 왜 이런 쇼에 나오고 싶어하는지 두 눈으로 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여기까지 온 인물이다. 각자의 비밀을 품고 있는 이들의 행보가 서사적 긴장을 고조시킨다.

허니비·박문영 지음·은행나무 발행·220쪽·1만3,000원

허니비·박문영 지음·은행나무 발행·220쪽·1만3,000원

장르소설의 힘은 현실성에 있다. 먼 미래를 배경으로 한 가상 세계지만 지금 우리의 모습을 닮지 않으면 공감을 끌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허니비'는 매우 힘 있는 소설이다.

허니비를 둘러싼 갑론을박은 저출산, 입양, 난임 등을 둘러싼 현재의 논란들과 포개진다. 게토와 인구 10만의 도시(메트로), 부유층이 몰려 있는 재건 특구(리부트)로 나뉜 주거 지역이 보여주는 계급 구조도 낯설지 않다. 인간과 클론이 공존하는 세계에 사라지지 않는 미묘한 차별도 언제나 이등 시민을 구분하려는 인류의 역사를 꼭 닮았다. 관음증적 미디어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양육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라고 요구하는 대중은 '당신의 아이를 사랑하는 시청자로서 알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집착적 관심은 결국, 부모가 아이에게 "내 덕에 사는 주제에"라는 소리를 듣고도 내색할 수 없는 극한의 상황까지 몰아간다.

박문영 소설에는 섣부른 판단이나 비극적 결론이 없다. 수많은 질문이 있다. 살아가려는 마음이 본능이라면 '잘' 살아가려는 마음은 어디서부터가 과욕이고 이기심인 건지, 인륜의 영역은 도대체 어디까지인지. 독자는 텍스트 안에서 그저 작은 용기를 길어낼 뿐이다. 현실에서는 너무 늦지 않게, 무기력하지 않게 조금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으리라는 마음으로.

진달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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