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138년 전인 1885년(고종 22) 5월 초, 조선 조정에 비상 첩보가 접수됐다. 보름 전(4월 15일) 남해 흥양현 소속 거문도에 영국 전함이 들이닥쳐 점거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러시아의 남진 저지’를 명분으로 내세운 이른바 거문도 사건이었다. 불법점령에 대한 영국의 공식통보는 5월 중순이 되어서야 중국을 통해 이뤄졌다.
□침략자였건만 거문도 주민은 영국군과 우호적 관계를 맺었다. 영국의 기지 건설에 필요한 노동력을 기꺼이 제공했다. 수탈만 하던 조선 조정과 달리, 영국은 기꺼이 보수를 지급하고 의료 지원까지 해줬기 때문이다. 영국군 주둔 상황을 직접 목격했던 생존 주민은 1962년의 한 인터뷰에서 “부녀자가 지나가면 뒤돌아서고, 우물물을 마시면 반드시 은화로 지불하고 갔다”고 영국 군인을 칭찬했다. 100여 년 전 조선과 영국의 국력과 수준 차이를 드러낸 사례다.
□그랬던 영국에 요즘 ‘브레그렛’(Bregret)이라는 말이 나돈다. 유럽연합(EU) 탈퇴 즉, 브렉시트(Brexit)를 후회(regret)한다는 뜻이다. 찬성 여론은 33%에 머물고, 반대는 53%에 달한다. 전문가 집단의 경고대로 경제가 망가졌기 때문이다. G7 국가 중 유일하게 물가상승률이 10%를 넘어섰다. “사실(Fact) 보다 중요한 건 국민 감정(Feeling)”이라는 정치 선동에 영국인들이 넘어간 결과라는 게 미국 저술가 톰 니콜스의 진단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브렉시트 같은 일이 한국에서도 벌어지는 것으로 여기는 모양이다. 방미 중 하버드대 연설에서 “허위 선동과 가짜뉴스가 디지털, 모바일과 결합하여 진실과 여론을 왜곡하는 일이 다반사가 됐다”고 말했다. 광우병 시위, 사드 전자파 의혹 등 국민의 분노 게이지를 극한 수준으로 끌어올렸으나, 흐지부지된 일련의 의혹들을 돌이켜보면 틀린 지적이 아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 미래는 없다’는 말이 있다. 맞는 말이다. 다만 100년 전 일본의 침략 못지않게, 3년 전 이뤄진 브렉시트(2020년 2월 1일)를 후회하는 영국 여론처럼 우리 현대사의 위험한 선동 사례도 잊지 말아야 한다. 영국 못지않게 우리도 선동의 대가를 충분히 치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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