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소 떼 방북을 본 건 중학생 때였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6월, 소 500마리를 실은 트럭 50대가 나란히 판문점을 지나 북으로 향하는 역사적 장면을 국내 방송사는 물론 미국 CNN 등 외신이 생중계할 정도로 전 세계가 주목했다. 누군가는 "20세기 최후의 전위예술"이라 했다.
내가 다닌 시골 중학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정규수업을 중단하고 TV를 시청했다. 물론 교실에서 소 떼 방북의 깊은 뜻을 아는 사람은 TV를 켠 담임 선생님뿐이었다. 대다수는 수업을 건너뛰게 해준 재벌 할아버지를 향해 환호했고 그중 몇몇은 10대 때 부친이 소 판 돈 70원을 몰래 들고 가출한 그의 개인사에 관심을 가졌다. 재벌이 된 그가 소 떼를 몰고 아버지 빚을 갚으려 60여 년 만에 금의환향한다니. 위인전에나 나올 법한 드라마 같은 이야기였다.
그것이 금강산 관광의 문을 여는 상징적 사건이었다는 건 한참이 지나서야 알았다. 정 회장은 남북 분단 이후 판문점을 통해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에 들어간 최초의 민간인이었고 그 길을 따라 북측 도장이 찍힌 금강산 관광개발합의서를 들고 내려왔다.
금강산 관광은 한때 히트 상품이었다. 하루 평균 2,000명(누적 195만 명)의 관광객이 금강산을 찾았다. 50년 넘게 고향 땅을 밟지 못한 실향민의 한도 풀어줬다. 고령의 실향민 아버지를 지게에 짊어지고 산에 오른 아들, 산꼭대기에서 추석 차례를 지내는 실향민 가족 사연이 전파를 탔다. 뿐만 아니다. 2000년 최초 남북 정상회담 성사에 기여했고, 개성공단 가동을 비롯해 남북 경제협력의 물꼬를 텄다. 서해교전, 북한의 1차 핵실험에도 계속됐던 관광이 2008년 피격사건으로 중단되기 전까지 일이다.
북한이 최근 금강산 관광특구에 있었던 현대아산 소유 해금강호텔을 완전 철거한 것으로 드러났다. 수십 년 전 호주 사업가가 만든 7층짜리 세계 최초의 해상호텔은 금강산 관광의 상징이기도 했다. 인프라가 부족했던 초기 금강산 관광 시절, 해외에서 중고로 들여와 바지선 위에 띄운 이 호텔은 전력과 용수, 오수 처리를 자체적으로 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해금강호텔의 비극적 운명은 수년 전부터 예견됐다. 관광 중단으로 10년 넘게 흉물로 방치됐고 2019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겨냥한 “보기만 해도 기분 나빠지는 너절한 남측 시설” 중 하나가 됐다. 5년 전 얼어붙은 한반도에 잠시 찾아왔던 봄도 금강산만은 비껴갔다.
해금강호텔의 최후는 금강산 관광의 최후이기도 하다. 현대그룹과 북한이 금강산 독점사업을 포함해 대규모 경제협력에 합의했던 1998년 가을, 기념사진에 등장한 정 회장과 그의 5남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모두 세상을 떠났다. 김정은 위원장은 금강산에 진 빚도, 추억도 없다. 오히려 “금강산 관광을 추진한 선임자들의 의존 정책이 잘못됐다”며 선친을 겨냥했다. 적잖은 실향민들이 세상을 등졌고, 설사 관광이 재개된다 해도 목숨 걸고 금강산을 밟을 간 큰 관광객도 없다. 만성 적자와 리스크를 감당하고 사업에 뛰어들 기업도 마찬가지다. 위성사진에서 사라진 해금강호텔처럼 그렇게 금강산 관광은 이제 역사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는 과거가 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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