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자기주장만 펼치는 시대 ‘내부를 들여다보는 관찰력’(인사이트)이 아닌 ‘기존 틀을 깨는 새로운 관점’(아웃사이트)이 필요합니다. 최병천 신성장경제연구소장이 격주로 여러 현안에 대해 보수와 진보의 고정관념을 넘은 새로운 관점의 글쓰기에 나섭니다.
20세기는 ‘진보의 시대’였다. 20세기 진보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두 가지였다. 첫째, 1917년 러시아 혁명이다. 세계 최초로 사회주의 국가가 만들어졌다. 둘째, 1991년 소련의 붕괴다.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가 몰락했다.
20세기 사회주의는 두 가지가 존재했다. 첫째, 소련식 공산주의였다. 둘째, 유럽식 사회민주주의(사민주의)였다. 경제 체제에 국한해서 볼 때, 소련식 공산주의는 유럽식 사민주의와 다섯 가지가 달랐다.
소련식 공산주의는 ①상품-시장의 부정 ②사적 소유 부정 ③이윤-자본가 부정 ④국유화 ⑤전면적 계획경제를 추구했다. 반면 유럽식 사민주의는 ①상품-시장의 긍정 ②사적 소유 인정 ③이윤-자본가 인정 ④혼합경제 ⑤전면적 계획경제를 반대했다. 유럽식 사민주의가 만들어낸 발명품이 혼합경제와 결합된 복지국가였다.
20세기 ‘반기업 진보주의’ vs 21세기 ‘친기업 진보주의’
한국 진보세력은 ‘1980년, 광주’를 계기로 사회주의를 수용하게 된다. 학살자 전두환을 몰아내기 위한 방법론의 일환이었다. 1980년대 한국에 수입된 사회주의는 소련식 공산주의였다. 1980~1990년대 학생운동을 열심히 했던 사람들일수록 시장, 사적 소유, 이윤-자본가에 대해 비판적인 스터디 경험을 갖고 있다. 그러나 소련식 사회주의는 체제 내부의 비효율에 의해 스스로 붕괴했다.
20세기 진보는 ‘반(反)기업 진보주의’였다. 친(親)노동을 하기 위해서는 반기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힘없는 민중과 함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련식 공산주의 체제에서 파생된 발상이다. 개별 기업을 국유화하고 전면적 계획경제를 실시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1980년대 한국 진보에 수입된 사회주의론도 대동소이했다.
21세기 진보는 ‘친기업 진보주의’를 표방할 필요가 있다. 자본과 노동은 본질적으로 대립적이라는 발상은 소련식 공산주의를 추구했던 사고에서 유래한다. 친기업이 곧 반노동인 것은 아니다. 국유화와 전면적 계획경제를 다시 추구할 것이 아니라면 경제를 움직이는 가장 중요한 주체는 ‘기업’이다. 투자와 고용의 주체는 기업이다. 노동의 최대 관심사는 고용과 소득증대다. 둘은 서로 연동되어 있다. 친기업과 친노동이 양립할 수 있는 이유다.
스웨덴식 복지국가는 사회주의자들이 만든 사회민주당이 설계했다. 이들은 법인세는 낮게, 소득세와 소비세는 높게 만들었다. 기업의 ‘투자촉진’이 노동의 고용증대 및 소득증대의 전제조건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노동자 계급의 정당인 스웨덴 사민당이 친기업 정책을 폈던 이유다.
‘친기업’ 수용, 진보는 보수와 무엇이 다른가?
진보가 ‘친기업’을 수용한다면 진보는 보수와 무엇이 다른가? ‘좋은 불평등’을 발간한 이후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이기도 하다.
대체 진보란 무엇인가? 우리는 ‘진보’ 개념 그 자체에 대해 되물을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 이후 진보 개념은 크게 3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①좌파(Left) ②미래(Future) ③약자와의 연대(solidarity with the weak)다. 하나씩 살펴보자.
첫째, ‘좌파’다. 좌파 개념은 프랑스 혁명에서 유래한다. 프랑스 혁명 이후 의장석을 기준으로 왼쪽에는 비특권계급인 제3신분인 공화파가 앉았다. 이후에는 급진파인 자코뱅당이 앉았다. 오른쪽에는 온건파인 지롱드당이 앉았다. 이때 좌파는 급진주의를 의미한다. 좌파=급진주의=진보의 등식이 성립한다.
좌파 개념에 의하면, 최저임금 1만 원보다 최저임금 2만 원이 더 진보적이다. 2만 원보다 3만 원이 더 진보적이다. 그러나 최저임금의 급진적 인상은 반드시 고용 분야에서 충격이 발생한다. 문재인 정부는 2018년 최저임금을 16.4% 인상했다. 2019년에는 10.9% 인상했다. 경제성장률이 2~3%인 나라에서 최저임금을 11~16% 올리면 반드시 부작용이 발생한다. 실제로 2018년 최저임금의 급진적 인상 이후 취업자 증가 규모는 역대 평균에 비해 4분의 1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경제정책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임금ㆍ고용은 생산성ㆍ투자와 연결되어 있다. ‘경제학적 원리’를 무시한 급진주의 정책이 반드시 실패하는 이유다.
둘째, 미래다. ‘미래’를 진보 개념의 본질로 주목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적 전통이다. 마르크스주의는 ‘방법론 마르크스’와 ‘결론 마르크스’로 구분할 수 있다. 방법론은 말 그대로 사회과학 방법론에 해당한다. 방법론의 핵심은 ‘정치경제학적’ 사고방식이다. 이는 사회주의 붕괴 이후 현재도 유효성을 갖는다.
마르크스 자신은 정작 ‘자본주의’라는 표현을 쓴 적이 거의 없다. 마르크스 자신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라는 개념을 주로 사용했다.
마르크스(1818~1883)가 살았던 유럽은 전환기였다. 봉건제적 생산양식과 자본제적 생산양식이 뒤엉켜 혼재했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라는 표현은 경제적 생산방식을 ‘인수분해 하는’ 발상이다. 동시대에도 상이한 생산방식이 공존하는 게 일반적이다. 수공업적 생산과 대공업적 생산이 공존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마르크스에게 진보는 ‘정치경제학적인 미래’를 의미했다. 다르게 표현하면 ‘미래적, 대안적 생산방식’이 진보의 핵심 개념이 된다.
2023년 현재 ‘진보적 생산방식’은 어떤 사람들일까? 기술기반 스타트업과 혁신형 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다. 미국 경제의 경우 애플의 스티브 잡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아마존의 제프 베이조스로 상징된다. 그 분야에서 일하는 지식 노동자들이다.
한국경제의 경우 ‘네카라쿠배당토’가 해당한다. 네이버, 카카오, 라인, 쿠팡, 배달의민족, 당근, 토스의 약자다. 기술기반 혁신기업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한국 진보, ‘좌파’를 버리고 ‘미래’로 가야 한다
마르크스의 표현 방식을 빌리면 한국 자본주의는 ‘산업자본주의적 생산방식’과 ‘스타트업적 생산방식’으로 구분할 수 있다. 후자가 진보적 생산방식의 핵심이다.
‘급진주의-좌파’ 중심의 진보 개념은 경제학적 원리를 무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부작용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다. 반면 ‘정치경제학적 미래’를 의미하는 진보 개념은 정반대다. 미래적-대안적 생산양식인지가 중요해진다.
셋째, ‘약자와의 연대’다. 인간 본성인 측은지심(惻隱之心ㆍ남을 가엽게 여기는 마음)에서 유래한다. 공동체의 안정, 통합, 지속가능한 번영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한국에서 약자는 누구인가? 먼저 장애인, 아동, 노인, 임산부가 떠오른다. 저임금 노동자도 있다.
정리해 보자. 자본주의 이후 작동했던 진보 개념에는 3종류가 있다. ①좌파 ②미래 ③약자와의 연대다. 좌파와 미래 개념을 중심으로 4분면 개념도를 만들면 표와 같다.
핵심 쟁점은 ‘급진주의’를 의미하는 좌파 개념과 ‘정치경제학적 미래’ 개념 중에서 무엇이 더 중요한지다. 다시 말해 과거지향+좌파와 미래지향+우파가 있다면 무엇이 더 진보적인가? 아마도 많은 사람은 좌파ㆍ급진주의보다 미래를 중시할 것이다. 바로 그렇다. 중요한 것은 좌파ㆍ급진주의가 아니다.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핵심 원리는 다수지배다. 민주주의는 51%다. 한국 자본주의 현실과 연동한다면 혁신경제가 진보다. 혁신기업의 기업가와 혁신기업의 지식노동자가 가장 진보적인 계층이다. 진보정치는 좌파를 버리고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 진보 경제학은 혁신경제의 편이 되어야 한다.
정리해 보자. 민주주의 사회에서 진보적 가치를 추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미래가 주도하되 약자와 연대해서 51% 정치연합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진보의 경제학과 진보의 정치학이 만나는 접점이기도 하다.
최병천 '좋은 불평등' 저자
신성장경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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