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20세기 초의 비행 경쟁
인류 최초의 여성 항공승무원 엘런 처치를 소개하며 언급했듯이 1920, 30년대 여객기는 교통수단이기 이전에 진귀한 볼거리이자 경험 자체가 이동의 목적을 능가하는 극강의 어드벤처 기구였다. 국가 차원에서도 하늘은 자존심이 걸린 뜨거운 경쟁 무대였다.
미국인 비행사 찰스 린드버그의 1927년 뉴욕-파리 대서양 논스톱 횡단 비행이 세기의 뉴스로 소개된 것도, 뉴욕의 한 부호가 저 비행에 거액의 상금을 건 배경도 그거였다. 린드버그에 앞서 영국 등 유럽의 여러 파일럿이 대서양 횡단 비행에 잇따라 성공했지만, 대부분 기록 자체를 위해 뉴펀들랜드-아일랜드 등 최단 거리를 노렸다. 린드버그는 섬이 아닌 대륙 중심도시를 오간 최초의 파일럿이었다.
일본 아사히신문이 1931년 태평양 논스톱 횡단 비행에 2만5,000달러 상금을 건 것도 유사한 의도였다. ‘일본의 린드버그’라 불리던 만 27세 파일럿 세이지 요시하라가 그해 5월 18일 사상 최초로 저 도전에 나섰다. 세계 주요 통신사의 집중적 관심 속에 시작된 그의 비행은 하지만, 쿠릴열도 해상 악천후로 인해 바다에 불시착하면서 무참히 실패했다.
최초 태평양 횡단 비행은 약 5개월 뒤 미국 비행사 클라이드 팽본(Clyde Pangborn, 1895~1958)과 부기장 휴 헌든에 의해 이뤄졌다. 비행교관 출신 곡예비행사로, 게이츠와 함께 세계일주 비행 기록 도전에 나섰다가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멈췄던 그는 1931년 10월 4일 아오모리현 사비시로 해안에 이륙해 41시간 13분 동안 8,500km(린드버그는 약 5,700여km)를 날아 워싱턴주 웨내치 해안에 동체착륙했다. 그들은 충분한 연료를 싣기 위해 연료통을 개조했고, 기체 하중을 줄이려고 이륙 후 바퀴까지 떼어냈다. 낙하산도 구명조끼도 없었고 심지어 신발도 벗어 고도의 추위까지 견뎌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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