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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터지면 '레커법'도 달려간다… 속도전이 낳은 부실 법안의 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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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터지면 '레커법'도 달려간다… 속도전이 낳은 부실 법안의 이면

입력
2023.05.23 04:30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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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사기·이태원 참사·LH 사태
여야 막론 비슷한 법안들 집중
최근 20년간 의원입법 증가세
법안 심사시간 '뚝' 부실 우려에
법제실 검토 활성화 등 개선안

김정재(가운데)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국토법안심사소위원장 등 위원들이 지난 16일 전세사기 피해자 지원 및 주거 안정에 관한 특별법안을 심사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김정재(가운데)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국토법안심사소위원장 등 위원들이 지난 16일 전세사기 피해자 지원 및 주거 안정에 관한 특별법안을 심사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사회적으로 주목받는 사건이 터지면 의원실에선 즉시 관련 법안 준비를 합니다. 의원 입장에선 이슈를 선점해야 언론에 노출되기 쉽고 법안 심사 과정에서도 발언할 명분이 생기거든요."

국회의원실 선임비서관

사회적 현안이 발생했을 때 해당 정부 부처 못지않게 바쁜 곳이 여의도 국회다. 법과 제도의 미비점을 빠르게 파악해 적시에 의원입법을 발의하는 게 최근 여의도 트렌드이기 때문이다.

요새 가장 핫한 입법 주제는 전세사기 대책이다. 전세사기 문제가 본격화한 지난해부터 최근까지 국회에 제출된 전세사기 관련 법안은 알려진 것만 50건 이상이다. 이 중 절반가량은 인천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자의 첫 사망 사건이 있었던 지난 2월 이후 집중적으로 발의됐다.

지난해 10월 발생한 이태원 참사 후속대책 입법도 이에 못지않다. 최근까지 최소 35건의 법안이 쏟아졌으며, 이 중 20%(7건)가 사고 발생 직후 1주일 사이에 발의됐다. '주최 측이 불분명한 대규모 행사의 안전관리 가이드라인을 만들어야 한다'는 내용의 재난안전법 개정안은 여야를 막론하고 10건 넘게 발의됐다. 2021년 초 한국토지주택공사(LH) 임직원의 부동산 투기가 국민적 공분을 일으켰을 당시엔 여야가 투기 근절 법안 40여 건을 쏟아냈다. 공직자의 미공개 정보 이용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내용이 대다수였다. 2020년에는 'N번방' 사태로 디지털 성범죄 문제가 이슈화하면서 불법 촬영물 유포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성폭력처벌법 개정안 등이 20건 이상 발의됐다.

국회에선 이처럼 사회적으로 주목받은 사건·사고 직후 경쟁적으로 발의되는 법안을 '레커법'이라고 부른다. 교통사고가 발생하면 레커(wrecker·견인차)가 사고차를 견인하는 것처럼 대중의 관심이 많은 이슈에 법안 발의가 쏠리는 현상을 일컫는 조어다. 입법부가 사회적 이슈에 발 빠르게 대응하는 것 자체를 뭐라고 할 순 없지만, 법안이 속도전 식으로 경쟁적으로 발의되다 보니 기존 법들과 내용이 중복되거나 부실하게 만들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게 문제다.

韓의원 발의 법안, 美의원 2배

'레커법' 현상은 의원입법 증가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된다.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17대 국회 기준 5,728건이었던 의원 발의 법안은 20대 국회에서 2만1,594건으로 급증했다. 현 21대 국회에선 지난달까지 1만9,563건이 접수됐다. 21대 국회 임기가 1년 이상 남은 만큼, 현 추세라면 20대 국회 기록을 뛰어넘을 전망이다.

의원 발의 법안의 증가는 '일하는 국회' 차원에서 평가하면 나쁘지 않다. 인공지능(AI) 등 신산업 등장으로 인해 입법 수요가 늘어날 수밖에 없는 환경적 요인도 존재한다. 다만 해외 사례와 비교했을 때 우리나라 국회의 입법량은 이례적으로 많은 편이다. 국회미래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국회의원의 1인당 평균 법안 발의 건수는 80.5건(20대 국회 기준)인데, 같은 대통령제 국가인 미국(40.6건)의 2배이고, 프랑스(3.5건)나 독일(1.2건), 일본(1.3건)에 비해서도 압도적으로 많다.

"법안 발의 건수, 공천 심사 때 반영"

의원 발의 법안의 증가는 의정활동 평가 기준과도 관련 있다. 여야 불문하고 각 당은 공천 심사 과정에서 법안 발의 건수를 정량 평가 요소로 삼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의 한 재선의원은 "법안 발의 건수는 통상 성실함의 척도로 여겨지고, 공천 심사 때 법안 통과 비율과 함께 점수로 매겨져 발의 법안이 적으면 불리하다"고 말했다. 의정활동 홍보에도 법안 발의는 유용한 수단이다. 한 국민의힘 의원은 "법안 발의와 관련해 언론 보도가 나오고 발의 건수도 집계돼 다른 의원들과 비교가 되기 때문에 신경을 안 쓸 수가 없다"며 "의정보고서를 낼 땐 반드시 발의한 법안의 경과를 소개한다"고 전했다.

정부입법에 비해 느슨한 절차도 의원입법 증가를 부채질한다. 정부입법의 경우 발의 전 단계에서 규제개혁위원회와 법제처 심사, 국무회의 심의를 거치기 때문에 통상 5~8개월이 걸린다. 반면 의원입법은 이런 절차 없이 의원 10인 이상 서명만 있으면 언제든 발의가 가능하다. 의원 제출 법안은 발의 전 국회사무처의 법제실을 통해 법문이나 다른 법률과의 충돌 문제를 검토하지만 의무사항이 아니다. 현 21대 국회에서 법제실 검토를 거쳐 제출된 법안은 30% 수준에 그쳤다. 공동 발의는 의원들 간 '품앗이' 형태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아 상호 검증에도 한계가 있다.

법안 폭증에 심사시간은 급감

문제는 무분별한 법안 발의가 부실한 법안 심사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의원 수는 한정돼 있는데 발의 건수가 늘어나면 법안당 심사시간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 구조다. 국회미래연구원에 따르면, 각 상임위원회 법안심사소위에 상정된 법안당 평균 심사시간은 17대 국회 때는 22.7분이었으나 20대 국회 들어 13.1분으로 급감했다. 자연스럽게 법안 심사를 지원하는 입법조사관 업무도 가중되고 있다. 한 상임위 전문위원은 "본질적인 내용이 아니라 점 하나만 바꾸는 수준의 개정안에 대해서도 검토보고서를 작성하느라 인력이 낭비되고 있다"고 말했다.

고려대 안암병원 간호사와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 조합원들이 지난 16일 오후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이 현장 방문한 서울 고려대학교 안암병원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간호법 제정안에 대한 법률안 거부권 행사를 규탄하며 손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고려대 안암병원 간호사와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 조합원들이 지난 16일 오후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이 현장 방문한 서울 고려대학교 안암병원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간호법 제정안에 대한 법률안 거부권 행사를 규탄하며 손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여소야대 국면에서 다수당인 야당의원들이 발의한 법안은 정부의 정책 방향과 충돌하기도 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야당 주도로 본회의를 통과한 양곡관리법과 간호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한 게 대표적 사례다. 이재묵 한국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분점정부(여소야대)에서 여야의 교착 상황이 장기화되면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각자의 목소리를 내면서 대의민주주의가 흔들릴 수 있다"고 말했다.


이광재 "규제영향분석해 시대변화 역행 방지"

이광재 국회 사무총장이 지난 3월 국회에서 '의원입법 규제관리 어떻게 할 것인가'를 주제로 열린 규제영향분석 토론회에 참석해 발언을 하고 있다. 국회 사무총장실 제공

이광재 국회 사무총장이 지난 3월 국회에서 '의원입법 규제관리 어떻게 할 것인가'를 주제로 열린 규제영향분석 토론회에 참석해 발언을 하고 있다. 국회 사무총장실 제공

국회는 보다 신중한 법안 발의를 유도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모색하고 있다. 국회사무처는 의원 발의 법안에 대해 법제실을 경유하도록 하고, 발의 준비과정이 담긴 제안경과서를 법안 제출 때 함께 수록하는 내용의 국회법 개정 작업을 논의하고 있다.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판정을 받은 '윤창호법'과 같은 사례를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광재 국회 사무총장은 "본회의까지 통과한 법이 헌법불합치나 위헌 결정을 받는다는 것은 입법의 질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뜻"이라며 "법제실 사전 검토만 거쳐도 법의 완결성이 올라갈 수 있다"고 말했다.

이해관계가 걸린 규제 법안에 대해선 보다 꼼꼼한 심사를 거치도록 할 예정이다. 현재 여야 모두 규제법안 심사 때 '규제영향분석'을 실시하는 방향으로 국회법 개정안을 발의한 상태다. '규제영향분석'에서 △기술 진화의 장애 △과도한 비용 초래 △사회적 갈등 발생 여부 등을 따지겠다는 취지다. 이 총장은 "법안이 기후위기나 디지털 등 시대변화를 선도한다면 100점짜리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최소한 시대 흐름을 가로막아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장재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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