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총 발굴은 지금 같으면 못해요. 나도 그렇게 큰 고분을 발굴하는 것은 강력 반대야. 50년 전에는 겁이 없었던 거야.” (최병현 숭실대 사학과 명예교수)
지금으로부터 반세기 전이었던 1973년, 현존하는 거의 유일한 신라시대 회화 ‘천마도’가 경북 경주시의 신라시대 고분 천마총(155호분)에서 발굴됐다. 1,500년의 세월을 견딘 천마도는 지금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전시 중이다. 일반 공개는 9년 만이다. 지난달 4일부터 열리고 있는 ‘천마, 다시 만나다' 전시에는 한 달 동안 11만7,000명이 다녀가는 등 천마도는 여전히 국민적 관심의 대상이다.
당시 대학을 갓 졸업하고 발굴 조사에 참여했던 최병현(75) 교수는 먼저 “천마총을 계기로 한국 학계의 발굴 기법이 크게 발전했다”고 평가했다. 해방 이후에도 소규모 발굴이 계속됐지만 대부분 고분 구조나 축조 방법을 밝히기는커녕 유적에서 유물을 빠르게 찾아내서 꺼내는 방식이었다는 것. 최 교수는 “천마총 발굴은 고분을 네 구획으로 나눠서 파 내려가는 ‘4분법’을 국내에서 처음 실시한 발굴이었다”면서 “현재는 16등분까지도 시행하는데 그 시작점이 천마총이었다”고 말했다.
두 번째 성과는 신라 고고학의 발전이다. 그는 "천마총과 황남대총 발굴을 통해서 신라시대 고분 양식인 ‘적석목곽분’의 축조 연대가 4세기 후반에서 6세기 초라는 사실이 확인됐다"고 말했다. 유물의 연대를 특정하는 '편년'이 이뤄진 것이다. 편년에 따라서 고분의 발전을 연구함으로써 당대 왕권의 발달 정도 등 고대사 전반이 새롭게 연구됐다.
무엇보다 천마총 발굴은 국내 고고학계가 보존과학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됐다. 당시에는 '보조과학'이라는 말 자체가 없었다. 발굴팀은 과학자를 수소문해 한국원자력연구소의 화학자 김유선 박사를 참여시켰다. 김 박사는 발굴 현장을 찾아서 썩은 나무 등 시료를 채취해 서울의 연구소로 가져갔고 조사단에 적절한 보존법을 알렸다. 시행착오도 있었다. 나무에 옷칠을 한 칠기 유물들이 보존처리 중 훼손되기도 했다. 조사단은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 천마도로 알려진 ‘천마그림 말다래 II’를 겨우 수습해 냈다.
최 교수는 “말다래 I과 말다래 II는 수습해서 바로 다음 날 서울로 올려 보냈다. 지금의 민속박물관 자리에 있던 국립박물관의 박물관장실 옆 부속실에 에어컨이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보존작업을 진행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부속실에는 딱 네 사람만 드나드는 것이 허용됐다. 그것도 30분씩만 작업하고 나왔다. 나오면서 분무기로 방에 물을 뿌리고 30분을 바깥에서 대기했다가 다시 들어가서 작업하는 과정이 이어졌다”고 덧붙였다. 그는 “김 박사가 아크릴 상자를 짜오게 하더니 거기에 천마도와 방부제, 습기 조절용 약품 등을 넣고 딱 밀봉해 버렸다. 그런 방법을 김 박사가 2, 3일 사이에 연구한 것”이라고 말했다.
애초에 학계는 천마총 발굴이 난제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이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1971년)의 일환으로 대형 고분인 ‘98호분(황남대총)’ 발굴을 추진하는 상황에서 학계 등 실무자들은 ‘155호분(천마총)’ 발굴을 대안으로 제시할 수밖에 없었다. 최 교수는 어렵게 세상에 드러난 문화재는 전문가들의 것이 아니라며 이렇게 강조했다. “그거는 국민 것이에요. 넓게는 인류의 것이에요. 그들이 유물을 누리고 향유해야 하죠. 누리려면 어떡해야 합니까? 모두가 함께 지켜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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