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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연대와 위계를 넘어서, 새로운 남성 되기

입력
2023.05.27 04:30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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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남자 되기'의 위계와 굴레에서 벗어나 '신-남성'이 되려면

지난 17일 강남역 여성살해 7주기 추모집회에 참여한 이한(앞줄 가운데) 작가 등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 회원들. 이한 작가 제공

지난 17일 강남역 여성살해 7주기 추모집회에 참여한 이한(앞줄 가운데) 작가 등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 회원들. 이한 작가 제공

“어쩌다 페미니즘 활동을 하게 되었나요?”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 활동을 하며 수백 번도 더 들은 질문이다. 대개의 경우 그때그때 떠오르는 결정적인 사건과 질문하는 사람의 상황, 욕구에 맞춰 대답을 해 주려 노력한다. 이를테면 2015년 무렵, 이른바 ‘페미니즘 리부트’라 불리는 페미니즘 대중화 물결로 성차별에 눈뜬 학교 친구들의 도움 덕분이기도 하고, 미투 운동과 ‘n번 방 사건’을 통해 느낀 변화의 필요성 같은 것들이 내가 페미니즘 활동을 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다. 하지만 잠자코 생각해 보면 대개의 결정적인 사건은 페미니즘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일 수는 있겠으나 일상에서 페미니즘 공부와 활동을 지속하게 만드는 힘은 아니었다. 지난하고 어려운 그 과정을 가능하게 했던 건 결국 나의 필요 때문이었다. 나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소통하기 위해 페미니즘이라는 언어가 필요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나와 성별이 다른 존재, 즉 여성과 가까워지기 위해 페미니즘을 접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내 절박함은 그보다 나와 내 주변의 남성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쪽에 가까웠다. 다시 말해, 내게 페미니즘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남성과 남성 문화를 설명하는 언어였다.

남성이 되기 위한 첫 번째 과정, 거세되는 감정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위대한 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는 그의 책 '제2의 성'에서 위와 같은 이야기로 여성이 단지 생물학적 성별로 규정되는 게 아니라 여성에게 부과되는 규범과 사회적 위치로 인해 결정된다는 것을 드러냈다. 그와 같을 수는 없겠지만 남성 역시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숫자나 성기의 모양에 의해서만 결정되지 않는다. 남성으로 태어나는 순간, 사회는 개인으로 하여금 남성에 어울리는 역할과 규범에 부응하도록 규제하며, 만약 개인이 충분히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경우 낙인과 처벌로 규제한다. 가장 흔한 사례가 감정 표현, 특히 슬퍼하거나 눈물 흘리는 등 부정적인 감정 표현에 인색하게 만드는 것이다. “남자는 태어나서 세 번만 운다”는 말도 안 되는 문구가 마치 속담처럼 자리한 현실만 봐도 그렇다. 이제는 누구도 쓰지 않을 것 같은 고리타분한 이 말이 여전히 남자 청소년 사이에서 경전처럼 떠돌 수 있는 건 우리의 지독한 성별고정관념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도 은연중에 계속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2016 파리사클레 대학교 과학자들이 발표한 실험에 따르면 실험 참가자들은 실제 아이들이 성별에 따른 울음소리 음높이의 차이가 없을 때에도 더 낮은 울음소리를 남자아이의 울음소리로 추정하며 낮은 음높이의 울음소리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 실험 결과는 양육자가 가지고 있는 무의식중 성별고정관념이 아주 어린아이의 양육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당장 주변에서 아이를 달래는 모습을 조금만 관찰해 보더라도 남자 어린이가 눈물을 거둘 때 ‘씩씩하다’고 칭찬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이것이 되게 대단한 악의, 성차별 의도가 분명한 행동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이런 은연중의 말, 태도, 행동이 스펀지 같은 어린이에게 자연스레 흡수되어 감정 표현에 어려움을 겪는 남성을 만든다.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에서 공유되는 밈(meme)인 '상남자 빙고'. 과장된 행동을 '상남자'의 조건으로 나열해 웃음을 자아낸다.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에서 공유되는 밈(meme)인 '상남자 빙고'. 과장된 행동을 '상남자'의 조건으로 나열해 웃음을 자아낸다.


남성 되기의 핵심, 남성연대와 위계질서

감정 표현을 억제하는 것 외에도 남성이 되기 위해 지켜야 할 암묵적인 룰은 무수히 많다. ‘상남자’의 면모를 드러내기 위해 위험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하고 때론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해야 하며 재력과 힘을 과시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으로 쓰인다. 막상 하나하나 뜯어놓고 보면 ‘남성 되기’란 얼마나 하찮고 우스우며 실현 불가능한지, 사실상 이 모든 ‘남성 되기’를 사시사철 철저하게 잘 수행할 수 있는 존재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데 왜 이토록 많은 남성이 심지어 유해하기까지 한 남성 되기 과정을 포기하지 못하고 애써 좇을까? 앞서 언급한 성별고정관념이 답습되는 양육과 교육과정, 남성 됨을 통해 자원을 독점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 등이 ‘남성 되기’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하나의 요소이겠지만 개중에서도 가장 큰 동력은 바로 위계질서다. 모든 남성이 같은 성별이라는 이유만으로 같은 이해관계를 가질 거라는 이상한 믿음으로 형성된 남성연대는 그 안에 뿌리 깊게 자리한 위계질서로 인해 브레이크가 고장 난 열차처럼 폭주하기 시작한다.

남자 셋이 모이면 위계가 생긴다

나는 아직도 학창시절 상급 학교로 진학하거나 전학 갔을 때 교실에 흐르던 미묘한 긴장과 기싸움의 기억이 생생하다. 키나 덩치는 얼마나 큰지, 축구나 게임을 잘하는지, 소위 ‘노는 형’ 같은 든든한 '빽'을 두고 있지는 않은지. 눈대중으로 열심히 간을 보다가 조금씩 충돌하면서 자신의 자리를 비집고 찾아가야 했고, 나는 이 방면에 썩 재능 있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그게 참 고단했다. 그래서 나는 ‘남자 셋이 모이면 위계가 생긴다’는 것을 아주 이른 시절 깨닫고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다양하게 발버둥 쳤다. 우두머리가 되지 못할 거란 것은 진작에 알았다. 그것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속 엄석대나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의 우식(이정진) 같은 이른바 ‘알파 메일(Alpha Male)’로 불리는 캐릭터의 몫이었다. 그보다는 2인자, 가능하다면 '쩜오(1.5)'로 이야기되는 자리를 탐했으나 대체로는 그 변두리에서 탈락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 쓰는 쪽에 가까웠다.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 속 학교 '1인자'인 우진(왼쪽, 이정진)과 현수(권상우). 한국일보 자료사진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 속 학교 '1인자'인 우진(왼쪽, 이정진)과 현수(권상우). 한국일보 자료사진

변두리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은 다분히 치사하고 유치했으니, 바로 “그래도 쟤보단 낫지”의 ‘쟤’를 드러내고 깎아내리며 우습게 만드는 전략이었다. 이런 모습은 지금 교실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슬픔을 드러내거나 운동을 좋아하지 않거나 게임을 못하거나 심지어 조금만 친절하게 굴어도 금방 “너 게이냐”, “계집애같이 군다”와 같은 혐오, 조롱의 말이 쏟아진다. ‘남자다움’이 무엇인지는 어차피 명확하지 않기에 그 모호함을 가리는 방법으로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등 취약성을 가진 존재를 ‘남자답지 않음’으로 등치시켜 위계의 밑바닥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 추악하고 위태로운 방법은 수많은 남성에게 타자를 밟고 일어설 경우 남자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어설픈 기대와 동시에 위계의 바닥을 향할 경우 피할 수 없는 낙인과 폭력의 대상이 될지 모른다는 공포를 안겨줌으로써 그 어떤 다른 가능성도 상상하지 못하게 만든다. 남성성 연구의 거장 R.W.코넬은 그의 책 '남성성/들'에서 이런 현상을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중심으로 그 가부장의 수혜를 나눔 받는 ‘공모적 남성성’, 그리고 배타적 위치에서 금기와 혐오의 대상이 되는 ‘종속적 남성성’으로 설명한다. 이 피라미드 같은 위계질서는 남성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남자 되기를 증명하고 갈망하게 만드는 가장 효율적인 남성 통제 방법이자 그 자체로 남성 되기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이 안에서 남성들은 타인의 강요나 요구 없이도 나락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 어떻게든 발버둥 치며 자체적으로 부역한다.

시시포스의 형벌에서 벗어나 새로운 남성 되기

이탈리아의 화가 티치아노 베첼리오가 1548~9년경 그린 시시포스. 시시포스는 제우스의 분노를 사 돌덩이를 산 위로 끊임없이 올려야 하는 형벌을 받은 신화 속 인물이다.

이탈리아의 화가 티치아노 베첼리오가 1548~9년경 그린 시시포스. 시시포스는 제우스의 분노를 사 돌덩이를 산 위로 끊임없이 올려야 하는 형벌을 받은 신화 속 인물이다.

페미니즘 의제 관련 시위 현장마다 꼭 등장하는 이들이 있다. ‘새로운 남성’이라고 붙인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고리타분한 혐오의 목소리로 페미니즘과 여성을 탓하는 안티페미니스트들이다. 이들은 그 어떤 페미니스트보다 열심히 페미니즘 활동에 등장해서 냉소와 혐오로 일관하며 페미니즘에 대한 각종 부정적인 가짜뉴스를 퍼트리는 데 최선을 다한다. 이들은 지난 5월 17일, 강남역 여성살해 7주기 추모 현장에도 나타나 (아무도 그러지 않고 관심조차 없음에도) 자신들을 ‘잠재적 가해자’ 취급하지 말라며 추모하는 이들을 향해 조롱하고 혐오를 쏟아냈다. 이러한 문제적 행태에 당연히 눈살을 찌푸리게 되지만 한편으로 이들의 행동은 남성연대 위계질서에서 바닥으로 떨어질까 두려운 마음을 차마 내색 못 하고 상대를 탓하거나 오직 분노만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여느 남성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들의 허세 섞인 혐오의 목소리는 페미니즘을 힐난하지만 사실 감춘 속내에는 여성들이 힘을 가져서 더 이상 자신들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될까 봐, 자신들이 밟고 일어설 대상이 부재해질까 봐, 그래서 그 어설프고 위태로운 남성 되기 세계관이 무너져버릴까 두려워하고 있다. 하지만 설령 이 위계질서의 정상에 오른들 그 불안이 사라질까? 도리어 몇 없는 자들을 위한 그 자리가 외롭고 언젠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 두려워 더 불안하지는 않을까? 신화 속 시시포스의 형벌 같은 위계질서에서 벗어나 정말로 새로운 남성이 되고 싶다면 고리타분한 기존의 위계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남성이라는 모호한 기준과 역할에 질문을 던지는 ‘신-남성’이 필요하다. 남자 되기의 위계질서 굴레에서 벗어나 눈치 보고 경쟁하지 않으며 그 시간에 서로를 보듬고 돌보는 일에 헌신하는 그런 남성이 필요하다. 감정 표현은 숨 쉬듯 자연스럽고 남성 되기에 구애받지 않으며 자유롭게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는 그런 삶이 필요하다. 더 나은 남성 되기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다른 남성과의 관계가 불편하다면, 남성들 사이에서 내 모습이 어색하고 만족스럽지 않다면, 주저 말고 함께하자.

우리에게는 이제 정말 새로운 신-남성이 필요하다.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습니다.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 활동가인 이한 작가와 김신현경 서울여대 교양대학 교수가 번갈아 글을 씁니다.

이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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