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구도 맞선 노무현 지지자
2040 결집 새로운 현상
편집자주
자기주장만 펼치는 시대 ‘내부를 들여다보는 관찰력’(인사이트)이 아닌 ‘기존 틀을 깨는 새로운 관점’(아웃사이트)이 필요합니다. 최병천 신성장경제연구소장이 격주로 여러 현안에 대해 보수와 진보의 고정관념을 넘은 새로운 관점의 글쓰기에 나섭니다.
지난 5월 23일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일이었다. 2009년 5월 23일이었다. 우리는 노무현 대통령을 한평생 ‘지역주의와 맞서 싸운’ 사람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지역주의와 맞서 싸운다’는 것이 실제로는 뭘 의미할까?
우리는 노무현 대통령이 대결했던 지역주의를 1987년 이후 한국 정치사에서 작동했던 ‘지역 구도’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한 사회가 주요하게 대립하는 정치적 균열 전선을 ‘갈등 축’이라고 표현한다. 갈등 축은 한편으로는 갈등과 대립을 만든다. 다른 한편으로는 갈등 축을 중심으로 진영 내부를 강력하게 결집시킨다.
한국 정치에서 갈등 축은 변화해 왔다. 크게 세 번의 변화 과정을 겪었다. ①민주 대 반민주 구도 ②지역 구도 ③세대 구도다. 갈등 축의 변화 과정은 동시에 한국 민주주의의 역동성을 보여준다.
한국정치사에서 민주화 투쟁이 강력해지는 분기점은 ‘1980년 광주’다. 이후 민주 대 반민주 구도가 형성된다.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마침내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다.
1987년 12월, 대선을 치른다. 민주정의당(민정당) 노태우, 통일민주당 김영삼, 평화민주당 김대중, 신민주공화당(공화당) 김종필 후보가 나온다.
선거 결과는 노태우 37%, 김영삼 28%, 김대중 27%, 김종필 8%였다. 4명의 후보는 각각 자신의 출신 지역에서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 노태우는 대구ㆍ경북, 김영삼은 부산ㆍ경남, 김대중은 호남, 김종필은 충청에서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 지역분할에 기반한 4자 구도가 등장하는 시점이다.
1990년 3당 합당 이후… 지역주의 부상
1988년 4월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된다. 1987년 6월 항쟁 직후에 치러진 첫 총선이었다. 4월 총선 역시 지역분할에 기반한 4자 구도가 재현된다. 민정당 125석(41.8%), 평화민주당 70석(23.4%), 통일민주당 59석(19.7%), 공화당 35석(11.7%)이 된다.
민주화 이후 실시된 1987년 대선과 1988년 총선은 역설적으로 ‘지역주의 구도’가 부상하게 된 분기점이다. 돌이켜보면, 지역주의 구도는 민주화 운동 내부에 탑재되어 있었다.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사건은 서울대생 박종철 열사의 물고문에 의한 죽음이었다. 영화 ‘1987’에서도 잘 다루고 있다. 이후, 6월 항쟁 과정에서 연세대생 이한열 열사가 시위 도중 최루탄을 직격으로 맞아 사망하게 된다.
박종철, 이한열은 1987년 6월 항쟁을 상징한다. 박종철 열사는 부산 출신이다. 이한열 열사는 광주 출신이다. 부산의 상징적 정치인은 김영삼이다. 광주의 상징적 정치인은 김대중이다. 1987년 6월 항쟁은 부산ㆍ경남을 대표하는 박종철과 김영삼, 호남을 대표하는 이한열과 김대중, 그리고 ‘전대협’(전국대학생연합)으로 상징되는 서울 지역 학생운동의 3자 간 합작품이었다.
1988년 총선 결과, 집권 여당이었던 민정당의 의석비율은 41.8%였다. 여소야대(與小野大) 국회가 만들어졌다. 노태우 대통령은 안정적 국정운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다. 야당과 합당을 추진한다. 1990년 3당 합당이다. 전체 299석 중 200석이 넘는 초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민자당)의 탄생이다.
노무현의 외로운 투쟁… ‘3당 합당 구도’와 맞서다
이때, 3당 합당을 반대했던 사람이 당시 통일민주당 소속의 노무현 의원, 김정길 의원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지역주의와 싸웠다고 말할 때, 그 지역주의는 ‘3당 합당 이후’의 정치 구도를 의미한다.
표는 1990년 3당 합당을 전후한 부산-경남 지역의 의석수 비율 변화를 보여준다. 1988년 총선에서 부산ㆍ경남 지역의 의석수 비율은 여당 35.1%(13석), 야당 합계 62.2%(23석)였다. 부산ㆍ경남 지역은 ‘야당 우위’ 지역이었다. 1992년 총선에서는 여당 79.5%(31석), 야당 합계 7.7%(3석)가 된다. 압도적인 ‘여당 우위’ 지역으로 바뀐다.
1990년 이후 한국정치는 ‘3당 합당 구도’가 지배했다고 표현할 수 있다. 1990년 3당 합당 이전과 이후의 ‘여당 의석수 비율 변화’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3당 합당 이전에 치러진 1988년 총선에서 국민의힘 계열 정당의 의석비율은 41.8%(125석)였다. 40%대 초반에 머물렀다.
1992년 총선부터 국민의힘 계열 의석 비율은 40%대 후반을 유지하게 된다. 1992년 총선은 49.8%(149석), 1996년 총선은 46.5%(139석), 2000년 총선은 48.7%(133석)의 의석을 갖게 된다.
1929년 세계대공황 이후 당선된 미국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뉴딜 연합을 통해 ‘다수파 정치연합’을 만들어냈다. 이를 소개하는 책이 크리스티 앤더슨의 ‘진보는 어떻게 다수파가 되는가’(이철희 역ㆍ후마니타스)다. 1990년 3당 합당은 한국정치사에서 ‘보수는 어떻게 다수파가 되는가’를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다.
3당 합당은 지역연합을 통한 다수파 전략이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불리한 정치구도를 한 방에 역전시키고, ‘다수파 연합’을 통해 보수 우위 구도를 만들었다. 한국 진보가 정치구도 자체를 바꾸는 ‘다수파 연합’을 꿈꾼다면, 보수에 한 수 배울 필요가 있다.
‘지역주의 구도’에서 민주화 세력이 집권한 두 가지 방법
강력한 지역 구도하에서 민주화 세력이 정권교체에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김대중의 방식과 노무현의 방식이 있었다.
먼저, 김대중의 방식이다. 김대중이 선택한 방법은 ‘지역구도를 역으로 활용하는’ 것이었다.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ㆍ김종필은 DJP연합을 성사시킨다. DJP연합은 유권자 연합의 관점에서 볼 때 호남ㆍ충청ㆍ수도권 연합을 의미한다.
김대중은 1996년 총선부터 김종필의 자민련을 배려한다. 자민련 후보가 수도권에 나오는 경우, 민주당 후보를 공천하지 않았다. ‘민주당ㆍ자민련 연합공천’의 모양새를 만들어준다. 김종필의 ‘신뢰’를 얻기 위한 조치였다.
정치인 김대중은 ‘지역 구도’로 포위되어 있을 때, 그것을 비난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지역구도를 역으로 활용하는’ 방법으로 정권교체에 성공한다. ‘권위주의 세력이 주도한’ 지역연합을 ‘민주화 세력이 주도하는’ 지역연합으로 극복한 경우다.
다음, 노무현의 방식이다. 2002년 대선을 앞두고, 김종필과의 정치연합은 깨진 상태였다. 민주당은 다시 소수파 정당이 됐다. 부산경남과 대구경북의 지역연합 구도는 여전히 호남을 압도했다.
노무현 후보는 3가지 전략을 통해 결국 집권에 성공한다. 첫째, 정몽준과의 후보 단일화다. 당시 대선 국면에서,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은 20% 내외였다. 박빙의 지지율 다툼을 하던 정몽준 후보와 단일화를 추진했고, 극적으로 승리했다.
둘째, ‘행정수도 이전’ 공약으로 충청도 유권자에게 어필했다. 행정수도 이전 공약은 ‘충청도 개발 공약’의 성격을 가졌다. DJP연합이 김종필과의 상층 정치연합이었다면, 행정수도 이전 공약은 ‘개발 공약’을 매개로 하는 하층 정치연합이었다.
셋째, 2040세대의 결집이다. 한국 정치사에서 ‘세대 구도’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시점이다. 노사모, 자발적 선거운동, 돼지 저금통은 깨끗한 정치인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2004년 총선은 민주화 세력이 처음으로 행정부와 입법부를 동시에 잡은 시점이다. 민주화 세력은 ‘반대를 통해’ 성장했다. 막상 집권을 한 이후, ‘만들고자 하는 세상’이 불투명했다. 2004년 국가보안법 폐지 등 운동권적 어젠다에 함몰되어 지지율이 급감하게 된다. 이후 2030 지지율도 급감하고 세대 구도도 약화된다. 2006~2008년 선거는 역대 최저 수준의 투표율을 기록한다.
‘세대 구도’는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다시 부활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한평생 고군분투하며 싸웠던 ‘지역구도’는 2040세대의 투표율 상승과 함께 후퇴하게 된다. 노무현이 죽자 그를 추모하며 세대 구도가 부활했고, 세대 구도가 부활하자 노무현도 부활했다.
최병천 '좋은 불평등' 저자
신성장경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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