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반 쇼크가 온다: 1-①소멸은 시작됐다]
전방 부대가 떠난 자리에 남은 사람들
편집자주
1970년 100만 명에 달했던 한해 출생아가 2002년 40만명 대로 내려앉은 지 20여 년. 기성 세대 반도 미치지 못하는 2002년생 이후 세대들이 20대가 되면서 교육, 군대, 지방도시 등 사회 전반이 인구 부족 충격에 휘청거리고 있다. 한국일보는 3부 12회에 걸쳐 '절반 세대'의 도래로 인한 시스템 붕괴와 대응 방안을 조명한다.
천우사엔 '군인백화점' 간판이 걸려 있다. 작은 가게 안에 군인들이 필요로 하는 거의 모든 물품을 빽빽하게 갖췄다. 군모, 계급장, 명찰, 견장, 마크, 군화, 더플백(속칭 따블백), 각종 방한용품 등. 총만 빼면 없는 게 없는 그야말로 백화점이다.
가게 한 편엔 '이기자 부대' 마크 수십 개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칠각형 방패에 아무런 상징물도 없이 '이기자' 세 글자만 새겨진 바로 그 빨간 마크다. 기자가 이기자 마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니, 이내 천우사 사장 김기주(62)씨가 말을 건넨다.
그거 돈 안 받을게요. 그냥 가져가도 괜찮아요.
사창리 터미널 옆 군장점 사장 김기주씨
강원 화천군 사내면 사창리터미널 옆에 자리잡은 군장점(軍裝店) 천우사. 김씨에게 이기자 부대 용품은 이젠 '팔 수도 없는 물건'이다. 지난해 11월 이기자라는 별칭으로 잘 알려진 육군 제27보병사단이 해체되며 역사 속으로 사라진 이후, 천우사엔 손님이 뚝 끊겼다. 매출은 4분의 1로 급감했단다.
서울(동서울터미널)과 시외버스로 직결되는 사창리. 바깥세상이 그리운 병사들이 '사스베가스'라는 별명을 붙인 그 곳. 그러나 지난달 26일 찾은 사스베가스 중심가와 터미널은 사람의 흔적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한산했다. 편의점과 버스 매표소를 함께 운영하는 김씨는 "부대가 떠나며 휴가로 오가는 병사들이 사라져 매표 수입이 절반으로 줄었다"며 하소연했다. 실제 사창리에서 동서울터미널로 가는 버스는 2020년 12대에서 지금은 7대로 운행편이 대폭 줄었다.
한창 때 사내면에만 여섯 곳의 군장점이 영업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남은 곳은 김씨네를 포함해 겨우 세 곳. 가족과 함께 운영하던 편의점, 군장점, 매표소 업무는 손님이 줄면서 이제 김씨 혼자 일을 해도 시간이 남는다. "장사를 접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아요." 하지만 군용품 특성상 물건을 처분하기가 어렵다. 대안이 안 보이는 현실에 김씨는 매일 쉬는 날 없이 꼭두새벽에 나와 저녁 늦게까지 가게를 지킨다.
"사창리에서 군인들이 사라졌다"
주말에 배달 주문 한 건도 없는 날이 부지기수예요.
이기자 부대 인근 중식당 사장 황승철씨
'주둔지 특수'를 누렸던 전방 지역 상권은 잇따른 군 부대 해체로 소멸해 가는 중이다. 국방부가 2018년 내놓은 국방개혁 2.0 이후 결정타를 맞았다. 상비병력 60만 명을 2022년까지 50만 명으로 단계적으로 감축하는 것이 국방개혁의 주 내용이다. 1953년 창설된 정예부대 27사단도 병역자원 감소 충격을 피하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지역 주민들은 반발했지만, 부대를 채울 병사들이 부족한지라 정부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사내면 전체 인구(약 5,800명)의 절반이 넘는 병력이 떠나면서, 이곳 지역 상권은 업종을 가리지 않고 몰락하는 중이다. 주말을 앞둔 금요일이었음에도 거리엔 사람들이 없었고 터미널 인근 택시승강장엔 택시 한 대만 하염없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내면에서 28년을 택시기사로 일한 유종우(54)씨는 "부대 해체 이후로 택시론 수입이 안 돼 (부업으로) 막노동을 다닌다"며 현재 상황을 전했다.
장병들이 많이 찾았던 업종의 타격이 특히 크다. 주말엔 예약 손님으로 가득차던 한 PC방은 현재 손님이 20%로 줄었다. 20년 넘게 PC방을 운영한 이모씨는 "주말 아르바이트생을 5명씩 쓰다 지금은 1명으로 줄였다"며 "전기요금도 못 건지니 밤에는 문을 닫는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2020년 이후 화천군에서 폐업한 PC방만 12곳이다. 외출·외박·수료식 수혜를 입던 숙박업계도 직격탄을 맞았다. 사내면에서 펜션을 운영하는 정수영 사내면 번영회장은 "예전엔 군인들로 주말마다 방이 꽉 찼는데 요샌 한 달에 10건도 안 나가 유지비도 못 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이 불황을 타개할 방법이 현재로선 없다. 사내면에서 중식당을 운영하는 황승철(58) 한국외식업중앙회 화천군지부장은 "장병들이 없으니 매출이 반토막"이라며 "20년 넘게 장사해 온 정든 이곳을 접고 읍내 쪽으로 가게를 옮길까 생각 중"이라고 사정을 전했다.
부대 해체로 시작된 지역경기 침체는 지역 공동체 소멸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지난달 기준 화천군 인구는 2만3,174명으로 27사단 해체가 본격화된 2019년 9월말보다 1,506명이 줄었다. 이 중 사내면은 6,469명에서 5,837명으로 줄며 감소율(9.8%)이 10%에 육박했다. 통계청 자료를 봐도 화천군은 지난해 전국 228개 시군구 중에서 인구 순유출률 2위다.
유소년 인구 감소도 두드러졌다. 사내면 초등학생 상당수가 군인 자녀였는데, 부대가 해체되면서 전학을 간 것으로 파악된다. 사내초등학교 전교생은 지난해 4월 223명이었으나 지금은 201명이다. 올해 입학생과 졸업생 수가 비슷했던 점을 고려하면 전학으로만 전체 학생의 10%가 나간 거다.
해체 앞둔 8군단, 안보 공백 우려도
지역안보 위협하는 8군단 해체 결사반대!!
강원 양양군 재향군인회가 내건 현수막
이런 일은 화천에서만 벌어지는 게 아니다. 동해안 지역 방위를 책임진 강원 양양군 8군단도 해체를 앞두고 있다. 8군단은 지난달 임무 해제와 함께 예하 부대를 3군단에 넘기며 이번 달 말 공식 해체된다. 군은 전체 군단 수를 8개에서 6개로, 사단을 39개에서 33개로 축소하는 국방개혁에 착수한 상태다.
8군단 본부가 위치한 양양은 화천만큼 군부대 의존도가 높진 않지만, 지역 경제 활성화에 꽤나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양양시장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김정숙씨는 "임무 해제 전엔 그래도 하루에 군인들이 서너 팀 꾸준히 오셨는데 지금은 전혀 안 보인다"고 상황을 전했다.
주민들은 부대 해체로 인한 안보 공백이 있을까봐 걱정하기도 한다. 정준화 강원도 시군번영회연합회장은 "3군단이 (태백산맥 너머) 인제군에 있는데, 이곳 동해안에서 긴급 상황이 발생하면 지휘통제가 빠르게 되겠느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지방자치단체도 걱정은 많지만 당장 어찌할 도리가 없다. 양양군청 관계자는 "8군단 자리에 3군단 인력들이 일부 들어오는 걸로 알고 있지만 상권에 영향이 없다고는 할 수는 없다"고 설명했다.
'절반 쇼크가 온다' 글 싣는 순서
제1부 인구 충격 진앙지, 절반세대
①소멸은 시작됐다
②2038 대한민국 예측 시나리오
③절반세대 연애·결혼·출산 리포트
④절반세대 탄생의 기원
제2부 무너진 시스템 다시 짜자
제3부 절반세대가 행복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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