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역의무자라 노동법 보호 대상 안 돼
64% "부당지시, 폭언 등 괴롭힘 경험"
복무기관 이전 어려워... "그저 참는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적용할 필요"
편집자주
월급쟁이의 삶은 그저 '존버'만이 답일까요? 애환을 털어놓을 곳도, 뾰족한 해결책도 없는 막막함을 <한국일보>가 함께 위로해 드립니다. '그래도 출근'은 어쩌면 나와 똑같은 문제를 겪고 있는 노동자에게 건네는 전문가들의 조언을 담습니다.
#1. 지난해 4월부터 지역아동센터에서 사회복무요원으로 근무 중인 김모씨는 1년 차 연차휴가 15일 중 열흘밖에 쓰지 못했다. 일이 너무 많아서다. 지역아동센터는 맞벌이ㆍ저소득 가정 자녀 등 방과 후 돌봄이 필요한 어린이를 보살피는 사회복지시설이다. 처음엔 청소, 행정지원 등 보조 업무를 주로 했다. 그러다 센터장이 해오던 직원 급여관리를 맡게 됐고, ‘1종 보통’ 면허를 소지하고 있다는 이유로 식재료 구매, 아동 하원 등 차량 업무까지 떠안았다. 최근엔 센터에 운영비를 지원하는 지방자치단체가 실시하는 기관 평가를 준비하는 ‘중책’도 맡았다. 2주 내내 야근을 하며 3년 치(2020~2022년) 아동 상담ㆍ관찰일지 등을 정리했다. 김씨는 7일 “복무기관을 변경하려 해도 (부당업무 지시 등은) 재지정 사유가 되지 못한다고 해 그저 빨리 시간이 가길 바라고 있다”고 한숨을 쉬었다.
#2. 지난해 12월 4급 보충역으로 훈련소에 입소한 정모씨는 유리 파편에 오른손을 베이는 사고를 당했다. 엄지ㆍ검지 신경이 손상돼 반년 이상 재활이 필요할 만큼 중상이었다. 훈련 중 입은 상해를 뜻하는 ‘공상(公傷)’ 판정도 받았다. 어렵게 훈련을 마친 그는 군 병원서 재활치료를 받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바로 근무지로 출근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사회복무요원은 현역병처럼 복무기간 중 군 병원에서 치료받을 수 있는 제도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병가(30일ㆍ초과 시 복무기간 연장)를 쓰거나, 복무를 일시 중단하고 병원에 가라는 답만 돌아왔다. 근무와 재활을 병행하는 탓에 반년이 지난 지금도 정씨는 안약 뚜껑조차 열지 못한다. 요리사가 꿈이라는 그는 “훈련하다 다쳤으면 치료라도 마음 편히 받게 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사회복무요원 괴롭힘 경험, 직장인 두 배
사회복무요원은 신체조건 등이 현역 군 복무에 적합하지 않아 국가기관, 지자체, 사회복지시설 등에서 대체복무를 하는 병역자원을 뜻한다. 저출산ㆍ고령화에 따른 복지수요가 급증하면서 사회복무요원의 역할과 중요성은 커지고 있다. 그러나 정작 이들은 근로기준법상 노동자가 아닌 병역의무자여서 노동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부당지시, 폭언, 폭행 등 직장 내 괴롭힘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는 셈이다. 게다가 신분상으로는 군인이 아닌 민간인이라 현역병에게 주어지는 사회적 대우나 혜택을 누리지도 못한다. 복무 고충을 호소하면 “현역 군인보다 편하게 병역 의무를 이행하니 감사하게 생각하라”는 핀잔만 돌아올 뿐이다. ‘공노비’라는 자조가 나오는 배경이다. 사회복무요원의 노동자성(性)을 인정하는 등 최소한의 권리를 보호하는 방안을 마련할 때가 됐다는 지적이 비등하다.
사회복무요원의 열악한 노동환경은 실태조사에서도 확인된다. 사회복무요원 노조가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시민단체 ‘직장갑질119’와 함께 지난달 1~28일 전ㆍ현직 사회복무요원 35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응답자 64.3%가 “직장 내 괴롭힘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올해 3월 직장갑질119가 실시한 직장인(1,000명) 인식조사에서 같은 답변을 한 비율(30.1%)보다 두 배나 높다. 박점규 직장갑질119 운영위원은 “사회복무요원을 상대로 한 괴롭힘 수준이 매우 심각하다는 사실이 입증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요원들이 경험한 괴롭힘으로는 ‘부당지시’가 48.9%로 가장 많았고 폭행ㆍ폭언(44.0%), 모욕ㆍ명예훼손(33.7%), 따돌림ㆍ차별(31.1%) 등의 순으로 뒤를 이었다. 주관식 조사에선 “사회복지사 실습생 실습일지도 대신 작성했다”, “동호회방 청소, 택배물 가져오기 등 사적 업무에 자주 동원됐다” 같은 증언이 쏟아졌다. 또 직원들이 ‘야’, ‘공익’ 등 비하적 호칭으로 부르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다수가 증언했다. 직장갑질119에는 공무원이 회식 도중 식당에서 사회복무요원들에게 뒷짐을 진 채 머리를 바닥에 대고 엎드리게 하는, 이른바 ‘원산폭격’ 등 가혹행위를 했다는 제보가 접수된 적도 있다.
보호망 없어... "복무 중 괴롭힘 금지법 제정해야"
문제는 이런 직장 내 갑질이나 부조리에 대응할 수 있는 사회복무요원들의 실질적 수단이 전무하다는 점이다. 사회복무요원은 근로기준법상 노동자가 아니라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근로기준법 제76조2항)’ 보호를 받지 못한다. 횡포를 더 이상 견디기 어려우면 직장인들은 사표를 내고 스스로 회사를 떠나지만, 이들은 복무기간(21개월)을 의무적으로 채워야 해 그럴 수도 없다. 물론 사회복무요원의 고충 처리를 위해 병무청이 운영하는 복무지도관 제도가 있긴 하다. 하지만 2020년 기준 지도관이 99명에 불과해 6만 명에 이르는 요원을 제대로 관리ㆍ감독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공영주차장에서 근무하는 사회복무요원 A씨는 “정신과 치료와 우울증 진단을 받은 병력을 호소하며 복무기관 재지정을 요청했으나, 복무지도관이 다른 요원의 자해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 사람도 재지정 안 됐다. 너도 안 된다’고 단칼에 거절했다”고 분노했다. 지난해 말 복무기관에서 성폭행 가해자를 마주친 사회복무요원이 복무기관 재지정을 신청했다가 거부당하자, 극단적 선택을 시도한 사례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실제 이번 실태조사에서 직장 내 괴롭힘을 경험한 사회복무요원 중 28%가 “극단적 선택을 고민한 적 있다”고 답했다. 3월 직장갑질119 조사에서 같은 답변을 한 직장인 비율이 10.6%인 것과도 뚜렷이 차이가 난다.
사회복무요원 노조 측이 ‘복무 중 괴롭힘 금지법’ 제정을 요구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미 2021년 5월 윤주경 국민의힘 의원의 발의로 사회복무요원에게도 직장 내 괴롭힘 금지 조항을 적용하는 내용의 병역법 개정안이 국회에 계류돼 있다. 해당 개정안을 검토한 국회 국방위원회 전문위원은 “바람직한 개정 방향”이라고 찬성 입장을 내비쳤다. 노조 관계자는 “이달 임시국회에서 개정안이 통과될 수 있도록 입법운동을 진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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