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출·수입 동시에 주는 불황형 흑자...90년 이후 5차례
고환율 등 대외 환경에서 비롯돼 악재 풀리면 수출 반등
전문가들 "앞으로는 악재 풀려도 수출 안 늘 수 있어"
정부가 적자 늪에 빠진 무역수지가 하반기에 좋아질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지만 산업계에서는 수출이 잘 돼서가 아니라 수입이 줄어서 이익을 내는 '불황형 흑자'가 될 거라는 걱정이 커지고 있다. 특히 하반기 닥칠 불황형 흑자는 환율, 유가 등 대외 악재에서 비롯된 이전과는 양상이 다를 것이라는 예상도 있어 장기적 대안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11일 한국무역협회가 올해 1~4월 수출입동향을 분석한 결과 수출 증감률, 수입 증감률이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해 각각 13.1%, 5% 줄며 253억 달러 적자를 기록했다.
이대로라면 수출과 수입 모두 역성장 흐름이 뚜렷해 무역수지가 흑자로 돌아서도 불황형 흑자에 그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고 있다. 장상식 무역협회 동향분석실장은 한국일보와 통화에서 "무역수지 적자 폭이 매달 줄고 있다"면서도 "흑자로 돌아서는 시점이 수출 반등보다 더 빨라질 것으로 보여 불황형 흑자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고 예상했다. 김종덕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무역통상실장도 "하반기 상황을 섣불리 예단하기 어렵다"면서도 "전반적으로 수출과 수입이 동시에 감소하는 추세가 계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무역 적자가 해소돼도 수출 반등을 기대하긴 어렵다는 말이다.
1990년 이후 다섯 차례 불황형 흑자...고환율·무역 경기에 달려
불황형 흑자는 말 그대로 경제 불황으로 수출이 줄며, 수출품의 원자재 수입이 줄어서 이익을 내는 현상을 말한다. 수출‧수입 증감률이 마이너스(-), 무역수지는 플러스(+)를 낸 불황형 흑자는 1990년 이후 우리나라에 다섯 차례 일어났다. 국제통화기금(IMF)발 외환위기 직후인 ①1998년과 ②2001년, 세계 금융위기 직후인 ③2009년, 글로벌 가치사슬(GVC)로 대표된 다국적 기업의 지역별 분업화가 약해진 ④2015~2016년, 반도체 경기가 하락 사이클을 맞은 ⑤2019~2020년이다.
모두 대외 환경이 나빠지는 상황이었고 그 악재가 풀리면서 수출이 되살아났던 공통점이 있다. 첫 불황형 흑자가 나타난 1998년 연평균 원·달러 환율은 1,398.9원으로 역대 가장 높았고, 이 기록은 아직 깨지지 않고 있다. 실질 경제성장률이 4.9%에 달한 2001년(1,290.8원)과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1,276.4원)에도 환율이 높아 전년 대비 수출액이 각각 12.7%, 13.9% 줄었다. 그러나 이듬해 환율이 안정세를 되찾으며 불황형 흑자를 탈출했다.
2015~2016년과 2019~2020년의 불황형 흑자는 전 세계적으로 진행됐던 산업 재편과 깊은 관계가 있다. 홍성욱 산업연구원 동향분석실장은 "2015년 전후는 중국 경제의 경착륙 우려로 글로벌 밸류체인이 확장되지 않아 세계 무역 시장이 출렁였다"며 "그 걱정이 사라지면서 2017년 경기 확장 국면에서 수출이 반등했다"고 설명했다. 2019년 전후 반도체 불황으로 다시 수출이 역성장했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반도체 경기가 되살아나며 2021년 수출액은 전년 대비 25.7% 늘었다.
하반기 환율·내수·설비투자 트리플 악재
문제는 하반기나 내년에 맞을 불황형 흑자는 이전 사례와 원인과 특징 모두 다르다는 점이다.
홍성욱 실장은 "과거 불황형 흑자는 2차 세계화와 맞물려 전 세계 교역량이 늘던 시기였다"며 "대외 악재만 해결되면 수출은 되살아났다"고 말했다. 그러나 코로나19 이후 교역량이 줄고 경제블록화가 심해지고 있어 ①앞으로는 대외 악재가 사라져도 우리나라 수출이 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다. 홍 실장은 "세계적 수요가 늘어도 우리나라 수출이 예전처럼 늘지 않을 수 있는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연원호 대외경제정책연구원 경제안보팀장도 "마지막 불황형 흑자였던 2019~2020년 미중 관세 전쟁 등 탈세계화 신호가 있었다"며 "그린 전환, 디지털 전환, 보호주의 등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탈세계화 특징이 하반기에도 이어질 예정이라 (우리 산업이 처한) 어려움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②최근의 수출 역성장이 대외 변수가 아닌 우리 수출 경쟁력이 떨어졌기 때문이란 진단도 뼈아프다. 역시 경기가 좋아져도 수출이 늘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다. 서진교 GS&J 인스티튜트 원장은 "이전 불황형 흑자 때는 환율, 유가 등이 올라 수입이 줄면서 수출액도 감소했다"라며 "반면 최근 무역적자는 수출액이 줄어 수입액도 줄어든 선후 관계가 바뀐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하반기 국내 민간소비와 설비투자가 저조할 것으로 전망돼 내수와 제조업의 생산 기반이 약해지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한국은행은 올 하반기 민간소비가 0.4% 느는 데 그치고, 설비투자는 전년 동기 대비 11.1% 감소할 것으로 보고 있다. 장상식 실장은 "하반기 불황형 흑자가 나타난다면 민간소비‧설비투자가 한꺼번에 낮아지고 고환율 등 세 가지 특징이 동시에 나타날 것"이라며 "이들 특징은 외환위기와 금융위기 때와 비슷하다"고 짚었다.
전문가들은 수출을 반등시키려면 시장과 품목을 다양화하고 고부가가치 산업에 더 많은 투자가 이어지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하라고 말한다. 서진교 원장은 "주요 수출 품목인 석유화학 등 장치산업은 자본이 들어가면 언제든지 후발 주자에게 경쟁력이 밀릴 수 있다"며 "반도체처럼 우리가 기술을 선점한 분야, 전기차처럼 모든 나라가 새로 뛰어드는 분야의 투자를 돕고 수출로 이어지는지 철저하게 사후 모니터링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미중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상황에서 줄타기는 단기 전략"이라며 "원칙에 입각한 통상 전략을 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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