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집은 ‘사고 파는 것’이기 전에 ‘삶을 사는 곳’입니다. 집에 맞춘 삶을 살고 있지는 않나요? 삶에, 또한 사람에 맞춰 지은 전국의 집을 찾아 소개하는 기획을 금요일 격주로 <한국일보>에 연재합니다.
도로에서 한 걸음만 들어가도 검은 기와지붕이 물결치듯 넘실대는 서울 종로구 북촌. 한옥 수십 채가 빼곡하게 들어선 골목 한가운데 한옥 위로 양옥이 포개진 특이한 건물이 우뚝 솟아있다. 낡은 한옥과 말끔한 벽돌집이 미묘한 조화를 이루며 존재감을 발산하는 이 집은 건축주 배국진(38)씨 가족이 살고, 가꿔나가는 주택 겸 스테이 '배진하우스'(대지면적 149.30㎡, 연면적 197.88㎡)다.
이 건물이 지어진 건 배씨가 오래전부터 품었던 공간 사업가로서의 야망과 동네 사랑이 씨앗이 됐다. 북촌 일대에서 10년째 숙박·문화 공간을 기획하고 만들어온 그는 주택 살이와 도시 민박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실현해 줄 건물을 짓기 위해 수년 동안 땅을 찾아 헤맸다고 한다. 100곳이 넘는 땅을 보고 난 뒤에야 만난 땅이 바로 현재의 집 터다. "북촌의 정취를 좋아해요. 크고 작은 공간을 만드는 과정에서 만났던 집, 사라져 가는 골목길과 공간에 대한 아쉬움과 갈증이 늘 있었죠. 이 땅이라면 평생 뿌리내릴 수 있는 내 집, 이곳을 찾는 여행자들의 기억에도 오래 남아있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 수 있겠다 싶었어요."
취향의 땅에 집을 짓다
두 개 필지 가운데 한쪽 땅의 지구단위 계획 조건인 기존 한옥을 살리되, 가족의 취향을 담아내면서 여행자들에게도 어필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려면 무엇보다 설계가 중요했다. 설계는 지인인 김윤수(바운더리스 건축사사무소 소장) 건축가가 맡았다. 북촌의 상징과도 같은 한옥을 재해석한 설계 작업은 건축가로서도 흥미로운 도전이었을 터. "주변 환경이 워낙 좋은 땅이었기 때문에 흔쾌히 맡았어요. 거기에 주거 공간과 스테이 공간, 한옥과 양옥이 섞인 반반건축을 시도해 볼 수 있는 드문 기회니까요."
개화기에 지어진 낡은 한옥에 새로운 표정을 입히는 고군분투는 그 후로 일 년 넘게 이어졌다. 한옥보전지구 방침이 오락가락하면서 설계가 여러 번 바뀌고, 심의와 협의가 미뤄져 공기도 늘어났다. 우여곡절 끝에, 남아있던 'ㄷ'자 한옥은 대청과 안채를 철거해 'ㄴ'자 형태가, 신축은 스킵플로어(skip floor·건물 각 층의 바닥 높이를 반 층 차로 설계하는 방식)를 적용한 4층짜리 건물이 됐다. 이 소장은 "작은 공간을 반 층씩 퍼즐을 끼워 맞추듯 쌓아올린 형태"라며 "한옥의 기와를 살리면서 12m로 높이 제한이 따르는 건물의 면적을 확보하기 위해 찾은 대안"이라고 설명했다.
한옥과 양옥이 결합한 하이브리드 건물의 매력은 두 덩어리가 물리적으로 맞붙은 1층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신축은 최대한 단순하게 드러내고 구옥은 최소한의 개입으로 고유의 분위기를 살렸다"는 건축가의 설명대로 두 건물의 이질적인 질감과 분위기가 묘한 조화를 이룬다. 도로 방향으로 나있는 새 건물의 입구로 들어가면 동선이 안마당을 지나 구옥까지 이어지는데 마치 긴 시간 통로를 지나 현재에서 과거로 가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 통로를 따라 새겨진 옛 흔적 가운데 하이라이트는 구옥 지붕과 맞붙은 새 건물의 필로티다. 얼핏 거울처럼 보이는 '미러 바리솔' 소재로 필로티 하부를 마감해 한옥 지붕의 상부를 비추도록 했다. "두 건물의 연결점에 세월의 단서들을 남겼죠. 수십 년 된 기와지붕이 새 건물에 투영되는 장면은 볼 때마다 재밌어요. 현재와 과거가 연결되는 느낌이랄까요."
이 건물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1층에는 베이커리 카페가 들어섰고, 감각 있는 공간으로 입소문을 타면서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모르긴 해도, 다른 건물이 나란히 붙어있는 모습이 사람들에게 신선하게 다가오나 봐요. 오랜 이야기를 품은 공간이 사라지지 않고 새롭게 다가갈 수 있으니 다행이죠."
공간 전문가의 내 집 활용법
1층이 옛 모습에 대한 동경으로 만들어진 공간이라면 2층부터 4층까지는 주거와 공간 임대라는 목적에 초점이 맞춰졌다. 배씨와 아내, 자녀가 사는 2층은 주방과 거실이 결합한 메인 공간과 반층 아래 방으로 구성했고, 민박을 운영하는 3층과 4층은 복층으로 만들어 오밀조밀한 공간을 구현했다.
한 가족이 살면서 여러 손님들이 머물다 가는 이 건물의 관전 포인트는 단연 '차경'이다. 북촌 풍경을 주인공 삼아 사방에 창을 냈기 때문에 어느 층에서도 전망대 못지않은 탁 트인 풍경을 즐길 수 있다. 건물 코너마다 설치한 창은 풍광을 입체적으로 끌어들이고, 곳곳에 난 아치 창은 분위기를 더욱 서정적으로 만든다. "가장 욕심을 부렸던 것이 풍경이었어요. 우뚝 솟아 있어 북촌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드문 기회를 활용한 거죠. 건물 자체가 북촌을 보는 하나의 프레임이 됐으면 했어요."
사는 이와 머무는 이가 가장 만족하는 부분도 바로 이 대목. 배씨 세 식구가 사는 2층 공간에서는 주변 한옥의 기와와 마당이 손에 잡힐 듯 내려다보이고, 손님이 쉬는 3, 4층 공간에서 먼 산의 능선과 지붕이 만드는 부드러운 스카이라인이 한눈에 들어온다. 프라이버시 보호가 중요한 욕실에도 넉넉한 크기의 창과 욕조를 설치해 풍경을 감상할 수 있게 했다. "주로 집에서 일을 하는데 문득 창밖을 보며 망중한을 즐기는 순간이 가장 행복해요. 아파트에 살 때처럼 획일적으로 주어지는 풍경이 아닌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창을 내고 매일 풍경을 즐길 수 있다는 점이 정말 만족스러워요."
다양한 레벨을 만들고 시각을 분산시킨 스킵 플로어 구조 역시 재미를 더하는 요소다. 김 소장은 "창을 보는 지점에 따라 다양한 풍경을 즐길 수 있도록 복층, 계단, 내부 창으로 복잡한 구조를 만들었다"며 "공간을 이동할 때마다 새로운 국면이 펼쳐지니 넓지 않은 공간이지만 전혀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다.
북촌집의 내일, 공간의 가치를 찾아
취향을 담은 땅에 옛 집을 살린 건물을 짓고, 그 공간 자체를 업으로 삼은 건축주. 배씨가 그리는 북촌집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언택트 키워드가 대두되면서 오프라인 공간을 하찮게 생각하는 경향도 있잖아요. 집을 매개로 사람들과 소통하며 공간의 힘을 확실히 알게 됐어요. 사람을 만나고, 감각을 깨우는 데 필요한 건 가상공간이 아니라 진짜 공간이라는 걸요. 지금은 숙박업에 집중하고 있지만 차차 이 동네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문화 공간으로 가꿔 나가고 싶어요."
북촌 풍경이 360도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옥상에 올라서자, 이 공간에서 북촌이라서 가능한 다양한 문화 이벤트를 기획해보고 싶다는 젊은 건축주의 꿈이 생생하게 다가왔다. "모든 가능성은 공간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해요. 이 집은 작은 시작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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