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다름과 틀림을 혼동하는 세상에 던지는 질문
"다른 건 다른 거고 틀린 건 틀린 거지, 다른 것과 틀린 건 다른 거고 틀린 게 아니야."
존경해 마지않는 선생님이 마치 한 편의 랩 음악처럼 뱉은 이 말이 꽤 오래 뇌리에 남았다. 실제로 "다르다"는 말과 "틀리다"는 말은 의미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혼동하여 사용한다. 특히 '다르다'는 말을 써야 할 때 '틀리다'를 쓰는 경우가 흔하다. 이를테면 나와 애인의 취미는 틀린 게 아닌 다른 것이며 어떤 음식에 대한 기대와 실제 맛 역시 틀리다기보단 다르다고 봐야겠다. 그러나 '바쁘다 바빠' 현대 사회를 살기 때문일까? 많은 사람들이 "내가 기대한 것과 맛이 완전 틀리네!", "둘은 취미가 틀려서 같이 놀기 어렵겠다"라고 이야기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에 크게 개의치 않는다. 마치 한때 짜장면을 짜장면이라 쓰지 못하고 자장면이라 써야 했을 때에도 짜장면을 고집하는 마음 같은 것일까? 하지만 나는 내심 그 사용법이 불편하다. 짜장면을 자장면으로 쓰든, 짜짱면으로 쓰든 의미가 달라지지 않지만 '다르다'와 '틀리다'는 의미부터 다르지 않은가! '다르다'와 '틀리다'는 다르게 쓰면 틀린 문장이 될 뿐만 아니라 의미도 달라지고 만다. 언어학자도 아니고 지금 잘못된 단어 사용 문제에 대해 논하자는 것도 아니면서 이 이야기를 꺼낸 건, 이런 식의 혼동이 우리의 일상적 사고에도 흔하게 영향을 미치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말 다를까?
페미니즘, 성평등과 관련해서 글을 쓰거나 교육을 하다보면 흔하게 듣는 이야기가 있다. 평등이 좋고 중요한 거 알겠는데, 다른 건 다른 거고 성별의 차이는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냐는 이야기다. 대체로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근거는 '내가 살아보니 그렇더라'인 경우가 많다. 실로 우리 일상에서 여성과 남성의 차이는 크게만 느껴진다. 단적으로 신체만 보더라도 그렇다. 남성들이 대체로 더 큰 키와 무거운 몸무게를 가지고 있으며, 무거운 물체를 들 때 더 유리하며 신체 활동에서도 더 적극적인 경우가 많다. 당장 학교만 보더라도 점심 시간 운동장을 둘러봤을 때, 온통 남성들뿐이기에 많은 청소년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놀랍지 않다. 우리는 정말 다르긴 다르지 않은가?
그런데 우리 신체는 왜 이렇게 다를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원시 인류의 사냥과 생존, 수렵과 채집, 적자생존과 진화에 대해 마치 그 원시 인류 때부터 살아온 사람처럼 이야기를 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겠지만 이번만큼은 참아줬으면 좋겠다. 굳이 생물학 전공자가 아니어도 진화에 대한 이야기쯤은 이미 지난하게 들어 왔으니까. 그런데 정말 그뿐일까? 진화와 생물학이 우리의 모든 차이를 다 설명할 수 있을까? MIT에서 발표한 한 연구에 따르면, 여성과 남성의 평균 키 차이의 약 12%, 길이로 치면 약 1.6㎝를 성별에 따른 유전자 차이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2021년 우리나라 남성과 여성 평균 키 차이가 약 13.2㎝다. 그렇다면 나머지 88%, 우리나라로 치면 11.6㎝의 차이는 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성차별이 심한 나라일수록 여성과 남성의 신체 차이도 커진다는 이야기가 있다. 성차별이 심할수록 남성에게는 근육질의 우락부락한 몸을 가질 것을 권장하고 여성에게는 날씬한 몸매를 가질 것을 권장하는 사회의 성별고정관념이 개인의 신체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라고 쉽게 추측할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섭식장애 환자의 81.1%가 여성이고 SNS에서는 '개말라 인간'이라는 이름의 '프로아나(거식증)'가 유행이라고 떠돌고 있다. 이런 사회문화적인 요소가 우리의 신체적인 차이를 더 크게 다르게 만드는 데 기여하지는 않았을까?
서로 다른 기대와 양육이 성차에 미치는 영향
사회의 목소리는 개인에게 쉽게 내면화된다. 강릉원주대 다문화학과 김지혜 교수의 책 '선량한 차별주의자'에는 미국의 한 수학 실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성적이 비슷한 남성과 여성 집단에게 똑같은 수학문제를 풀게 했는데, 실험자가 "이 연구는 성별에 따른 수학능력의 차이를 보기 위함입니다"라는 한 마디를 하자, 실제로 여성의 수학 점수가 낮게 나왔다. 분명 두 집단의 성적은 비슷했음에도 '여성은 수학을 잘 하지 못한다'는 기존 사회 통념이 여성들을 압박하여 영향을 미친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아주 어릴 때부터 서로 다르게 양육된다. 요즘 같은 시대에 그게 무슨 소리냐고 할 수 있겠지만, 마트의 장난감 코너에만 가더라도 확연히 다른 색깔로 구분된 여아, 남아 용품을 발견할 수 있다. 단지 색깔만 다른 게 아니다. 대부분의 남자 어린이용으로 판매되는 장난감은 조립하거나 경쟁하거나 바깥에서 가지고 놀면서 운동능력을 발달시킬 수 있는 것들이 많고, 여자 어린이용으로 판매되는 장난감은 소꿉놀이처럼 가사노동을 경험하거나 인형으로 돌봄을 하고 역할극을 통해 언어 능력을 발달시킬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우리는 이러한 사회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가. 그리고 이것을 단순히 '자연스러운 성차'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진정 '성차가 있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모든 조건을 통제한 진공 같은 공간에서 정확히 같은 태도와 방식으로 인간을 키워내는 비윤리적인 실험을 무수히 반복한 이후에나 가능할 것이다. 만약 이런 연구를 시도해보았거나, 시도해볼 게 아니라면 성차에 대한 근거 없는 확신보다 이 '왜'에 대한 고민을 이어가야 하지 않을까?
성차를 빙자한 편견과 차별
백번 양보해서, 우리가 가진 성차에 대한 사고를 반성해보거나 '왜'라는 질문을 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다름과 틀림을 구분하는 정도의 노력은 필요한 게 아닌가 싶지만, 그마저도 하지 않는 경우를 너무 많이 본다. 대표적으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일어나는 여성 경찰을 향한 혐오와 폭력이 있다. 이들의 주장은 단순하다. 여성은 신체적으로 경찰을 하기에 적절하지 않기 때문에 무능력하고 그래서 비난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위험한 현장 업무가 많고 범죄자를 제압해야 하는 경찰 업무의 특성상 여성은 경찰을 하기에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런 사고에는 겹겹의 편견과 오해가 있다.
일단 기본적으로 모든 여성은 남성과 마찬가지로 천차만별이라는 것을 잊고 있다. 그래서 실제로 경찰인 여성이 어떤 서사와 체력을 가지고 있는지 고려하지 않은 채, 모든 여성을 나약하다고 치부한다. 더 도덕적이고 정의로워야 할 경찰이 성매수를 하거나 음주운전, 심지어 폭력으로 물의를 일으킨 뉴스를 보곤 했다. 그 뉴스에 '역시 남성은 절제력이 부족하므로 경찰에는 적절하지 않다'며 가해자의 성별을 가지고 따져 묻는 이는 없었다. 그러한 문제가 변할 수 없는 성별 특성이 아니고 그러한 이유로 개개인을 제약할 수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경찰 역할의 다양성에 대한 이야기는 차치하더라도 경찰을 하는데 있어서 체력과 체급이 문제라면 그 화살은 성별을 떠나 모든 경찰에게로 향해야겠지만 그러지 않는다. 이런 사고가 유난히 여성에게만 향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여성을 개별 주체로 인식하지 못하고 '여성'이라는 성별로만 취급해온 여성혐오적인 현실을 반영한다.
서로 다른 우리가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나아가 다름을 근거로 개개인의 꿈과 역할을 제한, 평가하는 세상보다는 다름에도 불구하고 함께 사는 방법을 찾는 세상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활동가 김도현의 책 '장애학의 도전'에는 '장애인이기 때문에 차별받는 것이 아니라, 차별받기 때문에 장애인이 된다'는 문장이 나온다. 문제는 장애가 아닌, 장애인이 함께 살기 어렵게 만드는 사회에 있다는 이야기다. 다시 말해 장애는 다른 것일 뿐, 틀린 건 사회다. 누군가가 신체적 근력 차이로 정수기 물통을 교체하는 게 어렵다면 조롱하고 비웃을 게 아니라 그 정수기 물통이 어떤 사람의 근력을 기준으로 만들어졌는지 묻고 더 많은 사람이 같이 교체할 수 있게 조율할 일이다. 경찰이 더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하길 원한다면 단지 팔굽혀펴기 몇 번으로 평가할 게 아닌, 직무 적합성을 더 잘 살펴볼 수 있게 장애물 넘기, 추격 달리기, 피해자 구조 같은 항목을 반영하고 경찰 업무에 도움 되는 물품을 구비해야 하는 게 아닐까?
우리는 다르다. 하지만 다른 건 다른 거고 틀린 건 틀린 거지 다른 것과 틀린 건 다른 거고 틀린 게 아니다. 그러니까 서로 다른 우리가 또 다른 대로 함께 살아가기 위해 질문을 던지자. 정말 다른지, 왜 다른지, 그 다름을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건 무엇인지. 당장에 답이 나오지 않아도 다름을 틀림으로 치부하는 세상보다야 낫지 않을까. 그 과정이야말로 서로 다른 우리가 바라는 세상에, 함께하는 세상에 다다르는 길이 되지 않을까.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습니다.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 활동가인 이한 작가와 김신현경 서울여대 교양대학 교수가 번갈아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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