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반 쇼크가 온다: 1-③절반세대 연애·결혼·출산 리포트]
절반세대 500명+90년대생 500명 인식조사 결과
편집자주
1970년 100만 명에 달했던 한 해 출생아가 2002년 40만 명대로 내려앉은 지 20여 년. 기성세대 반도 미치지 못하는 2002년생 이후 세대들이 20대가 되면서 교육, 군대, 지방도시 등 사회 전반이 인구 부족 충격에 휘청거리고 있다. 한국일보는 3부 12회에 걸쳐 '절반 세대'의 도래로 인한 시스템 붕괴와 대응 방안을 조명한다.
"아이요? 엄마도 낳지 말라던데요?"
2004년생 대학생 박효린(가명·19)씨
올해 경남의 한 대학 간호학과에 입학한 박효린(가명·19)씨는 인생에서 일찌감치 출산이란 선택지를 지웠다. 졸업 후 서울로 올라가 유명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는 '유능한 간호사'가 되려 한다. 그런데 아이 때문에 자신의 인생 목표가 가로막힐 걸 생각하면 벌써부터 속이 답답하다고 한다. 근무가 불규칙하고 노동 강도가 센 간호사 업무 특성을 감안하면 출산·육아는 언감생심. 학창시절부터 남들과의 경쟁에서 뒤처지는 걸 못 견뎌했다는 효린씨는 "내 커리어도 놓치고, 아이도 잘 못 키울까봐 두렵다"고 했다.
이제 막 스물을 넘긴 청춘이 하기엔 때 이른 걱정 아닐까 싶지만, 효린씨는 단호했다. "두 마리 토끼(커리어와 육아) 다 놓칠 바에야, 한 마리(커리어)에만 집중하는 게 훨씬 더 합리적이고 안정된 선택 아닐까요." 스물넷에 결혼해 두 아이를 낳고 키우느라 경력 단절의 쓴맛을 봤던 효린씨 어머니(1979년생)도 "능력이 되면 자기 일하면서 혼자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며 딸의 비출산 의사를 존중했다고 한다.
20대 초반 여성들의 '출산 보이콧'
대한민국에서 '아이 낳지 않을 결심'을 하는 연령이 확 어려지고 있다.
결혼·출산 압박에 본격 시달리기 시작하는 30대 초반 여성보다, 2002년 전후 출생자인 20대 초반 절반세대가 더욱 강력하게 출산을 보이콧하고 있다.
가정에선 아들 딸 구분 없이 사랑받았고, 학교에서도 차별 없이 대우받으며 개인적 성취를 이뤄온 세대. 자기만족과 효능감에 몰두하는 절반세대에겐 출산과 육아로 인해 자신의 커리어가 흔들릴지 모른다는 공포가 더 크게 다가왔다. 부모세대(1970년생 100만 명)의 절반 규모(2002년생 49만 명)인 인구집단의 출산 거부 의사가 뚜렷해지면서, 합계출산율(한 여성이 낳을 것으로 기대되는 평균 출생아 수)이 1명 아래로 추락한 '인구쇼크'가 대물림될 것이 거의 확실하다.
한국일보가 창간 69주년을 맞아, 한국리서치와 실시한 '절반세대 연애·결혼·출산 인식조사'에서 절반세대 여성 10명 중 4명은 '아이를 낳고 싶지 않다'(44.8%)고 적극적으로 출산 거부 의사를 드러냈다. '아이를 낳고 싶지 않다'는 30대 여성 응답(36.2%)보다 '출산 보이콧' 의향이 더 높아진 것이다. 출산 관련 인식에서도, 절반세대 여성들은 '출산 하지 않는 것이 좋다'(30.3%)고 답하며 출산에 부정적 의견을 드러냈다. 사회생활을 경험하며, 결혼·출산 적령기에 맞닥뜨린 30대 초반 여성들이 출산에 갖는 부정적 인식(20.3%)보다 10%포인트 높은 수치다.
삼포세대 신조어도 벌써 12년
이번 조사는 결혼 출산 이슈에 당면한 90년대생 초반(1991~1994년생) 30대 남녀 그룹, 2000년대생 초반 절반세대(2001~2004년생) 남녀 그룹을 각 500명씩 뽑아 총 1,000명을 상대로 한 웹조사로 진행됐다.
1990년대생은 대한민국에서 출생아 수가 '반짝' 반등했던 '마지막 세대'다. 정부는 이들이 저출생 위기를 붙잡아줄 최후의 해결사가 돼 주기를 고대하고 있지만, 짝사랑으로 끝날 공산이 커 보인다.
90년대생과 2000년대생 왜 비교했나
정부와 학계에선 저출생 위기를 붙잡아줄 해결사로 90년대생을 소환한다. 속절없이 인구가 줄어들기만 하는 대한민국에서 출생아 수가 반등했던 '마지막 세대'이기 때문. 통계청에 따르면 1990년(64만9,738명)까지 60만명 대 중반을 기록하며 감소 추세던 출생아수가 1991년 70만 9,275명으로 확 뛰었다. 이후 1995년까지 유지되던 '70만명'은,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위기를 겪으면서 무너진다. 이후 2001년 50만대(55만 9,934명)로 처음 떨어진 뒤, 2002년 건국 이래 처음 인구가 반토막 난 절반세대(49만 6,911명)가 출현했다.
당장 이번 조사에서도 90년대생과 절반세대 그룹 모두에서 "결혼·출산을 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은 절반 안팎을 넘기지 못했다. 특히 성별 차이에 따른 불일치가 커 보였다. "결혼 출산을 하는 것이 좋다"는 데 남성들은 50% 안팎이 동의했지만, 여성들은 20%대에 그쳤다. 그러나 남녀 공히 "반드시 해야 한다"는 응답은 10% 안팎에 불과했다.
'삼포세대'(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한 집단) 신조어가 등장한 지도 벌써 12년. 저출생이 디폴트(기본값)가 된 시대에서 이 땅의 청춘들에게 연애·결혼·출산은 하는 것보다 안 하는 게 자연스러운 생애 주기로 굳어졌다.
출산은 포기 넘어 비토 단계로
특히 절반세대 여성들의 비토가 제일 강경했다.
출산에 있어 확고한 거부 의사를 드러낸 절반세대 여성들은, 결혼과 연애도 시큰둥했다. "연애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는 의견이 63.1%로 유일하게 과반을 넘겼고,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부정 응답(18.3%)도 90년대생 여성(20.3%)들과 비슷하게 나왔다. 경제적 부담을 이유로 결혼을 주저하는 경향이 짙은 30대 초반 남성(26.5%)보다 결혼할 가능성을 더 낮게 보고 있는 것(30.4%)도 눈에 띈다.
절반세대 여성들에게 연애·결혼·출산은 이제 포기를 넘어선 냉소의 단어가 됐다. 전문가들은 이를 '생존주의 세대'가 살아남으려는 본능이 발현된 결과로 봤다.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는 "멀게는 부모세대가 겪은 1997년 외환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며 청년들이 느끼는 삶의 불안정성, 불확실성이 커졌다"며 "일단 나부터 살아남는 게 중요한 상황에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것은 사치일 수밖에 없다"고 해석했다.
절반세대 여성들이 유독 더 결혼과 출산에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건 왜일까. 자신의 직업적 커리어가 망가질 것에 대한 두려움이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자녀를 낳지 않겠다고 밝힌 절반세대 여성 10명 중 8명은 출산과 육아로 인한 경력 단절을 걱정(82.2%)했는데, 이는 90년대생 여성들의 응답(72.7%)보다 높은 것이다. 반면 절반세대 남성들의 경우, 자녀 출산과 양육으로 자신의 커리어가 단절될 것에 우려를 표한 응답은 40%에 불과해 대조를 이뤘다.
"한국 사회 나아지지 않을 것" 66%
아이를 낳아도 제대로 잘 키울 수 있을지, 한국에서 아이를 낳는 게 과연 옳은 선택일지에 대한 불안감도 출산을 주저하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다. 이런 우려는 세대·성별을 막론하고 공유되는 정서였는데, 특히 90년대생 여성들의 민감도가 더 높았다. 이들은 한국 사회가 "아이가 행복하고 안전하기 힘든 사회여서"(94.8%), "한국의 치열한 경쟁과 교육 제도 아래 키우기 싫어서"(90.9%)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반박했다.
미래 전망이 어두워질수록, 출산 의향이 강하게 줄어드는 것도 새삼 확인됐다. 세대·남녀 가릴 것 없이 한국에서 삶의 조건이 나아지지 않을 것이란 응답이 과반을 넘었는데, 출산을 가장 적극적으로 거부한 절반세대 여성이 가장 크게 비관(66.4%)했다.
출산이 '부담'이라면, 결혼은 '손해'로 인식하는 경향이 컸다. 결혼할 의향이 없는 이유에 대해 모든 그룹에서 '자녀 양육 및 가사 노동 증가 부담'을 가장 많이 뽑았는데, 절반세대 여성, 90년대생 여성의 응답이 각각 97.8%, 95.7%로 압도적으로 높았다. 신경아 교수는 "가정 학교에서 차별받지 않고 동등하게 자라온 절반세대 여성들에게 결혼·출산에 따른 양육은 성취를 가로막는 걸림돌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며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은 보편화했는데, 남성이 동등하게 가사를 부담하고 아이 돌봄에 나서는 변화는 너무 더딘 게 문제"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일본 사례를 들어 경고했다.
"2000년대 초반, 일본에서 출산율이 떨어지자 '조용한 혁명'이란 말이 회자된 적이 있어요. 여성들이 육아와 일을 병행하기 너무 어려운데, 사회가 바꾸지 못하자 변화를 요구하는 대신, 조용히 출산을 보이콧하는 방식으로 대응한 거죠. 한국도 똑같아요. 위기가 심각하다면서, 정부와 기업 모두 제대로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어요."
그사이 절반세대들의 '조용한 혁명'은 이미 시작됐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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