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하영 '숙희가 만든 실험영화' (릿터 6, 7월호)
편집자주
단편소설은 한국 문학의 최전선입니다. 하지만 책으로 묶여 나오기 전까지 널리 읽히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한국일보는 '이 단편소설 아시나요?(이단아)' 코너를 통해 흥미로운 단편소설을 소개해드립니다.
'아줌마'는 참 복잡미묘한 단어다. 중년 여성을 일컫는 사전적 의미 이상이다. 여성 비하의 뉘앙스를 풍기기도 하고 때론 '아줌마의 힘'이라며 칭송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흥미로운 건, 어느 쪽이든 아줌마라고 처음 불리는 경험은 썩 달갑지 않다는 점이다. 나이를 짐작해 선택한 호칭에 반감부터 생겨서다.
격월간 문예지 릿터(6, 7월호)에 실린 전하영의 '숙희가 만든 실험영화'는 그런 반감을 지녔던 '숙희'의 이야기다. 쉰을 앞두고 아줌마란 호칭에 겨우 둔감해진 그는 또 다른 난관(?)에 부딪힌다. 바로 '할머니'다. 할머니가 된 친구의 소식을 들은 후의 숙희 내면의 움직임을 작가는 가만히 들여다본다. 여성의 나이에 대한 고정관념에 질문을 던지며 살아온 인물의 혼란과 나이 듦에 대한 태도를 통해 우리 안의 편견을 마주하게 된다.
친구 '윤미'가 숙희를 초대하면서 소설은 시작된다. 8개월 된 손녀 '제인'을 돌보기 위해 괌에 거주하는 딸네 집에 간 윤미는 숙희에게 괌 여행을 제안한다. 어린 나이에 딸을 낳아 어머니에게 육아를 전적으로 맡겼던 윤미. 그 미안함 때문에 딸을 돕겠다고 갔지만 힘든 건 힘든 것. 숙희가 오면 자신의 생활에도 숨통을 틀 수 있을까 하는 기대를 했다. 하지만 비행공포증이 있는 숙희는 15년 만의 해외여행을 망설인다.
사실 숙희의 뇌리에 충격을 준 건 괌도 여행도 아니었다. 할머니라는 단어였다. 8개월 된 손녀를 안고 있는 윤미의 모습이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둘은 '아줌마'처럼 되고 싶지 않았던 아줌마들이다. 혼자 사는 숙희와 딸을 엄마에게 맡긴 윤미는 직장을 다니며 자기 자신에 충실한 30, 40대를 보냈다. 그런 윤미가 자기 스스로를 '할머니'라고 부르는 일이, 숙희에게는 '이제 할머니란 호칭에 익숙해지라'는 압박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냥 나로 살 수는 없는 건가. 숙희는 그런 생각을 한다. "할머니가 되는 것도, 되지 않는 것도, 너무 어렵다."
찬영의 존재는 고민을 더 깊게 만든다. 열여섯 살 어린 찬영과 연애 비슷한 것을 하는 동안 숙희는 끊임없이 자기혐오와 자기 객관화에 골몰했다. 거리에서 팔짱 끼고 걷기도 어려운 찬영과의 관계에 전적으로 몰입하기는 어려웠다. 자신처럼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상대와 연애하는 남자들도 이런 고민을 할까 궁금증도 들었지만 그런 억울함이 해결해 주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숙희는 윤미가 할머니가 됐다는 소식을 듣고 석 달간 연락을 끊었던 찬영에게 다시 전화를 건다. 그건 성적인 의미를 완전히 배제한 아줌마와 할머니란 단어에 대한 반감이었을지 모른다. 숙희는 계속 질문을 던진다. 이 불안은 단지 갱년기의 증상인 건지, 나이가 들어도 남자들처럼 생물학적인 자식을 갖는 일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는 삶은 어떤 것인지, 홀로 경제적 부담을 지는 나의 연애 방식의 문제는 무엇인지 등등. 이는 중노년 여성의 연애와 성, 나이 듦 등에 대한 작가의 질문이기도 하다. 동시에 나이를 기준으로 한 한계선을 여성에게 더 엄격하게 들이대는 사회를 향한 물음이기도 하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