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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미국의 채찍이 우릴 더 강하게"... 금강불괴 자처하는 중국 반도체

입력
2023.06.16 10:30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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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반도체 굴기의 현주소: ①어디까지 왔나]
중국 현지에서 확인한 반도체 산업 생태계

편집자주

중국 반도체 기술이 한국을 맹추격 중입니다. 중국 반도체 수준은 어디까지 올라왔고 앞으로 얼마나 발전할까요? 미국과의 반도체 전쟁을 버텨낼 수 있을까요? 한국일보가 상세히 짚어봤습니다.

지난달 16일 중국 선전 세계 컨벤션 센터에서 열린 반도체 산업 전시회. 800개 이상 기업이 전시관을 열었고, 5만 명 이상의 반도체 기업 관계자가 참석했다. 안하늘 기자

지난달 16일 중국 선전 세계 컨벤션 센터에서 열린 반도체 산업 전시회. 800개 이상 기업이 전시관을 열었고, 5만 명 이상의 반도체 기업 관계자가 참석했다. 안하늘 기자


지난달 16일 중국의 실리콘밸리로 불리는 선전 시내에서 차로 1시간 떨어진 세계전시컨벤션센터. 이른 아침부터 차량이 대거 몰려,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빠져나가는데만 20분 이상 걸렸다. 여기가 이렇게 북새통이었던 것은 이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후 처음으로 반도체·디스플레이 분야 산업 전시회가 열렸기 때문이다.

이곳은 실내 전시 면적만 40만㎡(12만 1,000평)에 이르는 아시아 최대 전시장. 이 넓은 공간에 사람이 가득 찼다. 반도체 전시에만 800개 이상 현지 기업이 참여했고, 중신궈지(SMIC)나 베이팡화창(NAURA) 등 중국 대표 반도체 소재·장비·설계 기업 관계자 5만 명 이상이 방문했다. 부스마다 문전성시를 이룬 모습에서 중국 반도체 산업의 역동성을 느낄 수 있었다.

2018년 미국이 중국을 상대로 첨단 반도체 장비 수출을 규제한 이후 중국 기업들은 핵심 부품 자립화에 사활을 걸고 있다. 이날 전시장에서 만난 중국의 그래픽처리장치(GPU) 제조 기업 메타엑스(Metax) 관계자는 "인공지능(AI) 데이터 처리에 필요한 연산의 크기가 급증하면서 그에 따른 비용도 천문학적으로 커졌다"며 "앞선 패키지 기술과 추리연산 능력으로 데이터 처리 비용을 효과적으로 줄일 GPU를 개발 중"이라고 소개했다. 이 회사는 이미 지난해 7나노미터(nm·1nm=10억분의 1m) 기반의 첫 번째 GPU를 대만 TSMC를 통해 생산했으며, 내년 양산을 목표로 데이터센터용 AI GPU를 개발 중이다. 세계 최대 GPU 업체 미국 엔비디아를 대체하는 게 목표다. 중국은 미국 정부 규제 때문에 지금 엔비디아의 최첨단 GPU를 수입하지 못한다.

자국산 쓰는 중국… "한국 브랜드론 힘들다"

지난달 16일 중국 선전 세계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인공지능(AI) 반도체 세미나. 안하늘 기자

지난달 16일 중국 선전 세계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인공지능(AI) 반도체 세미나. 안하늘 기자

"미국 규제 때문에 힘든 점은 없나요?" 여기서 만난 중국 반도체 업계 사람들에게 이렇게 물었더니 "그런 일 없다"며 모두 고개를 저었다. 한국과 서방 언론에선 중국 반도체 산업이 어려움을 맞이했다고 보도하지만, 중국인들은 "미국 규제가 오히려 반도체 굴기를 채찍질하는 원동력이 됐다"고 말한다.

중국 반도체가 확실한 '자립의 길'로 나아가면서, 한국 반도체 회사들이 설 자리는 자연히 좁아졌다. 모바일 기기에 들어가는 반도체를 중국 업체에 납품하는 A사 관계자는 "작년부터 중국 경쟁사에게 시장 점유율을 빠르게 빼앗기고 있다"며 "중국 정부와 기업들이 자국 부품을 쓰는 쪽으로 돌아서면서 한국 제품은 기술이 우수해도 선택을 못 받는다"고 말했다. 정부의 전폭적 지원과 스마트폰 제조사의 기술 협력 덕분에, 중국 반도체 부품사들의 실력도 단기간에 일취월장했다고 그는 설명했다. 결국 최근 이 회사는 중국에 별도 회사를 설립하고, 이 회사를 통해 부품을 납품하는 식으로 영업 구조를 바꿨다. 한국 브랜드로 승부를 볼 수 없으니 마치 중국 기업처럼 겉포장을 바꿔 영업을 해보자는 결단이었다.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광학식손떨림방지(OIS) 칩을 생산하는 한국 기업 동운아나텍은 지난해 말 아예 중국의 한 정보통신(IT) 기업에 중화권 독점 판매권을 넘겼다. 중국 기업이 동운아나텍의 부품으로 영업을 해 매출을 가져가고, 동운아나텍은 2,100만 달러의 계약금과 수수료 일부만 받는 구조다. 동운아나텍은 한때 중국 시장에서 90%에 가까운 점유율을 기록하는 강소기업이었지만, 최근 중국 현지 기업들에게 점유율을 빠르게 빼앗기며 이런 결정을 내린 것으로 전해진다. 현지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중국 사업 하는 사람에게 (현지 영업을 포기한) 동운아나텍은 일종의 모범사례"라면서도 "개별 회사 입장에선 망하기 전에 돈이라도 챙겼지만, 한국 반도체 생태계 입장에서 보면 상당한 손실이 발생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반도체판 요소수 사태 일어나나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선전에서 활동 중인 한국 반도체 업계 관계자들은 중국의 도광양회(韜光養晦·재능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인내하며 때를 기다림)가 시작됐다고 본다. 중국이 목소리를 낮추고 장기전에 들어갔다는 평가다.

이병인 한중시스템IC협력연구원장은 "중국이 2010년대 후반부터 반도체 굴기를 외칠 때마다 미국이 아픈 곳만 골라 때렸다"며 "그래서 중국 정부가 이제는 반도체와 관련한 어떠한 성과나 투자 계획도 공식적으로 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이 원장은 "이미 3기 반도체 투자 펀드가 발족되고 대대적인 투자 계획이 발표됐어야 하지만, 그랬다가 다시 미국의 규제를 촉발할 수 있는 만큼 절제된 정책을 쓰는 것"이라고 전했다.

대신 중국은 미국 규제가 없는 영역에서 빠르게 영향력을 키워나가고 있다. 대표적으로 구형(레거시) 반도체 시장에서 중국의 성장 속도는 상상초월이다. 미국이나 한국 기업은 10나노 이하 최첨단 공정에만 관심을 가지지만 이런 반도체가 들어가는 제품은 스마트폰, 데이터센터 등 제한적이다. 반면 전기차, 가전기기, 스마트공장 등 수많은 분야에 여전히 28나노 이상의 공정을 거친 구형 반도체가 들어간다. 전체 반도체 시장에서 이런 레거시 제품의 비중은 75%다. 시장조사업체 IBS는 전세계 레거시 반도체 시장에서 중국 점유율이 2025년 40%대까지 늘어날 것으로 예상했다.

문제는 부품 하나라도 부족하면 완제품 조립이 불가능한 IT산업 특성상, 구형 반도체 수급 불안이 IT 시장 전체의 불안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전병서 중국경제금융연구소장은 중국이 장악한 레거시 반도체의 불안 요소를 지난해 요소수 사태에 비교했다. 그는 "우리가 기술이 없어 요소수를 못 만든 게 아니라 중국이 가격과 물량으로 공세를 벌여 시장을 장악한 결과"라며 "반도체 분야에서도 요소수 사태와 같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무조건 지원→옥석 가리기

[h알파] ep.42 중국 반도체 굴기의 현재 화면 캡처

[h알파] ep.42 중국 반도체 굴기의 현재 화면 캡처

다만 중국이 반도체 자립을 외치고는 있지만, 관련 생태계와 기술이 아직은 서방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의 규제는 중국 반도체 산업 발전에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하는 게 사실이다. 중국 과학기술 전문 매체 티엠티포스트에 따르면 지난 2년 간 폐업한 중국 반도체 기업만 총 9,166곳이다. 중국 스마트폰 업체 오포(OPPO)는 2019년부터 수조 원을 들여 자사 기기에 사용할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반도체를 개발하다가 최근 그 꿈을 접었다.

이를 두고 중국의 반도체 굴기가 실패했다는 평가도 나왔지만 현지에선 '옥석 가리기'로 본다. 중국 현지 반도체 관계자는 "오포 정도 되는 기업이 사업을 정리한다는 건 정부가 더 이상 이 분야에 지원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라며 "중국 정부가 냉혹한 현실을 깨닫고 장비나 위탁생산(파운드리) 공장 구축 등 보다 시급한 분야로 선택과 집중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선전= 안하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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