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출생 문제에 수도권 과밀 큰 영향
2002년 첫 저출생 경고등 켜졌지만
20년간 수도권 집중 가속화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지나고 보니, 대한민국의 맥점을 짚은 절묘한 한 수였다. 관습헌법이란 헌법재판소의 억지 논리에 발목이 잡히지만 않았다면. 인구절벽의 충격이 덮치는 지금 상황을 따지다 보면 20년 전 노무현 대통령의 수도 이전 추진이 좌절됐던 게 대한민국으로선 통탄할 일이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누군가는 저출생과 수도 이전이 무슨 상관이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물론 독박 육아나 일과 육아를 병행할 수 없는 환경 등이 여성들이 '출산 파업'을 벌일 만한 요인인 것은 맞지만 수도권 과밀 역시 저출생 문제에 상당한 지분을 갖고 있다. 과밀로 인한 높은 집값, 교통체증, 사교육 경쟁 등이 “내 한 몸 건사하기 힘든데 자식은 무슨”이란 심리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과밀로 인한 경쟁 격화로 자기 생존 본능이 재생산 본능을 압도한다는 얘기다.
실제 국내 대표적 인구학자인 조영태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에 따르면, 오스트리아 인구학자인 볼프강 러츠가 2006년 세계 145개국을 대상으로 실시한 연구에서 인구밀도가 합계출산율과 밀접한 관련성을 갖는다고 밝혔고, 우리나라를 대상으로 한 서울대 인구학연구실 분석에서도 인구밀도와 인구편중도가 출산율에 미치는 영향이 뚜렷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경험상으로 봐도 경기도에서 서울로 매일 한 시간 반 이상 출근 전쟁을 치르고 주말 근교 나들이 때도 주차장 같은 도로 정체를 겪다 보면 “이게 사는 건가” 싶은 회의감이 치밀 때가 적지 않다. 흙수저로 태어난 젊은이들은 오죽할까. 집 하나 구하기 힘든 현실에서 결혼과 출산은 미친 짓이거나 사치일 수밖에 없다.
20년 전 그때 청와대와 국회, 정부청사가 정말 모두 세종으로 옮겼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2004년 1,000만 명 수준이었던 경기도 인구는 내외국인 합쳐 올해 4월 사상 처음 1,400만 명선(1400만3,527명)도 돌파했다. 수도 이전은 이런 광적인 수도권 집중에 브레이크 역할을 했을 게 분명하다.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 이후 세종시가 행정중심복합도시로 재추진됐지만, 반쪽 이전으로 인해 행정의 비효율성만 커진 지금과는 무척 다른 인구 지도가 그려졌을 것이다.
지역균형발전을 내세웠던 노무현 대통령이 대선에서 당선됐던 2002년은 저출생의 첫 경고등이 켜졌던 해였다. 1990년대 60만~70만 명을 기록했던 한 해 출생아가 2001년 55만 명을 찍더니 2002년에는 49만 명으로 뚝 내려앉았다. 한 해 90만 명에서 100만 명씩 태어났던 1955~1974년생과 비교하면 절반 수준으로 떨어진 것이다. 40만 명대로 떨어진 한 해 출생아는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2017년부터 더 급락해 지난해는 24만9,000명을 기록했다. 반의 반토막이 나버린 것이다.
지난 20년 동안 저출생과 지방소멸의 경고음이 끊임없이 울렸지만 수도권 집중은 가속화했다. 예전에는 지역균형발전을 위한 시늉이라도 있었지만, 이젠 정부나 정치권이 아예 손을 놓아 버린 듯하다. 모두가 알지만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사이, 첫 저출생 세대인 2002년생이 20대의 성인 문턱을 넘었다. 한 해 90만 명에서 100만 명의 출생아로 짜였던 사회적 인프라는 '절반 세대'의 도래로 곳곳에서 파열음을 내고 있다. 지방대학과 인근 소도시들은 이미 소멸의 직격탄을 맞았고 군대 역시 심각한 병역 부족 사태로 흔들리고 있다. 이들이 본격적으로 취업시장에 나서면 노동력 부족 문제도 심각해질 것이다. 이제 대한민국 인구 반토막은 정해진 미래다. 20년 전 그때 다른 길을 생각했던 노무현의 선견지명과 그 길의 가능성을 봉쇄했던 관습헌법의 논리는 회한 속에서 역사의 뒤틀린 기로로 두고두고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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