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반도체 굴기의 현주소: ③굴하지 않는 중국]
중국의 실리콘밸리 중관춘에서 본 반도체 전쟁
편집자주
중국 반도체 기술이 한국을 맹추격 중입니다. 중국 반도체 수준은 어디까지 올라왔고 앞으로 얼마나 발전할까요? 미국과의 반도체 전쟁을 버텨낼 수 있을까요? 한국일보가 상세히 짚어봤습니다.
중국 수도 베이징 중심가에서 차로 약 1시간 가까이를 남쪽으로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이좡(亦莊)신도시의 경제기술개발구(北京經濟技術開發區). 베이징의 특별구인 이곳은 법인세 감면 혜택 덕분에 각종 정보통신(IT) 대기업들이 자리 잡은 첨단 산업의 중심지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19년 1월 방중 당시 굳이 시간을 들여 방문했던 곳이기도 하다.
지난달 29일 한국일보가 직접 가본 베이징 경제기술개발구는 한국 지식산업의 요람인 판교를 떠올리게 했다. 그 중심가에 중국 최대의 반도체 위탁생산(파운드리) 업체 중신궈지(SMIC)의 베이징1·2공장이 있다. 국가집적회로산업투자펀드(대기금)와 베이징시의 투자를 받아 설립된 이곳은 24~180나노미터(nm·1nm=10억분의 1m)의 12인치 웨이퍼 월 16만 장 생산 설비를 갖춘, SMIC의 본진과도 같은 곳이다.
성숙공정 중심인 까닭에 미국 제재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면서, SMIC 공장 주변은 평상시와 다를 바 없이 평화로웠다. 정문 앞에는 출근한 직원들의 자전거 수백여 대가 무질서하게 주차돼 있고, 점심 배달을 온 노란색 오토바이의 메이퇀(중국의 배달 플랫폼) 배달원 수십 명이 하염없이 직원들을 기다렸다. 공장 우측에는 SMIC가 칩 설계를 위해 중국 내 대학, 연구기관들과 설립한 합작법인(JV)인 STIC의 신축 건물 공사가 한창이었다.
미국 제재로 첨단공정엔 확실한 타격
하지만 활기찬 이곳과 다르게 베이징1, 2공장에서 남쪽으로 30분 가량 떨어진 경제기술개발구 외곽의 SMIC 베이징3공장은 미국 제재의 여파를 정면으로 맞아 황량하기 그지 없었다.
SMIC가 베이징3공장은 짓기 시작한 것은 2020년 12월. 첨단공정인 7~14나노미터 반도체 양산을 위해 중국이 뽑은 '회심의 카드'가 SMIC 베이징3공장이다. SMIC는 베이징, 상하이, 선전, 톈진 등에 총 8개의 공장을 운용하고 있는데, 14나노 이하의 첨단공정 반도체 양산이 가능한 곳은 상하이 공장이 유일했다. 중국 전체로 봐도 14나노 이하 양산은 SMIC 상하이 공장에서만 가능했다. TSMC와 삼성전자에 한참 뒤처져 세계시장 점유율 5위에 그치는 SMIC가 추격을 위해 던진 승부수였던 셈이다.
하지만 미국이 SMIC를 대중제재 블랙리스트에 포함시키면서, 베이징3공장을 통해 7나노 반도체를 양산하며 기술 추격의 발판을 만들려고 했던 중국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최신 공정을 위해선 반도체장비 업체 세계 1위인 네덜란드 ASML의 극자외선(EUV) 노광장비가 필수인데, 중국으로의 수입이 금지되면서 공장을 돌릴 수가 없어진 것이다.
실제로 한국일보가 직접 찾은 베이징3공장 건설 현장은 공장 외관만 완성됐을 뿐 주변에는 행인이 한 명도 없을 정도로 분위기가 을씨년스러웠다. 계획대로라면 올해 1분기부터 매달 12인치 웨이퍼 5만 장을 찍어냈어야 했을 곳이었다. 빅펀드와 베이징시가 한국 돈으로 8조 원 넘게 투입하며 애써 지은 공장이 '휴업' 상태에 들어간 것이다.
공장 주변에선 활기 대신 경계심만 가득했다. 경비원이 한 명이 의심스럽다는 눈빛으로 취재진을 쏘아보며 정문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경비원은 취재진에게 "어디에서 왔느냐"고 계속해서 묻더니 "외국인인 것 같은데 공안을 부르겠다"며 엄포를 놓기도 했다.
미 제재 대상 SMIC, 작년 매출 33% 급증
SMIC 1·2공장과 3공장의 대조적인 상황은 지금 중국 반도체 산업이 맞이한 기회와 위기를 동시에 보여주는 장면이다. 첨단공정을 목표로 지어진 3공장 상황만 보면, 미국의 대중 반도체 제재는 효과를 발휘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SMIC의 매출 관련 지표를 보면 과연 이 회사가 미국 제재로 철퇴를 맞은 게 사실인지가 의심스러울 정도다. SMIC는 미국의 강력한 제재 속에서도 지난해 역대 최고 매출(72억 달러)을 기록했다. 2021년 매출에 비해 무려 33.6% 급증한 것인데, 이 회사의 지난해 순이익만 18억 달러(2조3,000억 원)에 달한다.
타격이 적었던 이유는 매출의 74%가 중국 내수시장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고영화 베이징 한국창업원장은 "보통 전체 반도체 시장의 70%가 28나노 이상의 성숙공정에서 나온다"면서 "스마트폰, 인공지능(AI) 등에 들어가는 반도체 첨단공정에선 미국 제재의 영향을 받을지라도, 자동차부터 가전제품 등에 들어가는 반도체를 만드는 성숙공정에서는 중국 회사들이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있다"고 이유를 분석했다.
이런 중국 반도체 산업의 활기는 중국 정보통신(IT) 산업의 중심지인 중관춘(中關村)에서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중관춘은 베이징 북서부 하이뎬구에 위치한 중국 내 첫 번째 국가자주혁신시범구다. 중국 정부가 1988년 개혁과 혁신을 위해 첨단기술 분야의 시험지구(테스트필드)의 형태로 처음 만들었는데, 베이징대와 칭화대 등 중국을 대표하는 41개 대학들이 몰려 있어 매해 고급 인력이 쏟아져 나오는 '인재의 화수분'이다.
게다가 중관춘은 바이두, 레노버 등 주요 IT 기업들이 입주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중국과학원과 중국공정원 등 국가연구소만 200곳이 넘으며, 지난해 2만7,000여 개의 입주기업이 올린 총수익만 8조7,000억 위안(약 1,630조 원)에 달한다.
한국 용산전자상가처럼 대규모 전자상가가 밀집해 있었다가 전자상거래 확산 탓에 대부분 문을 닫았지만, 중관춘 과학기술무역센터 내 전자상가는 여전히 문전성시였다. 지난달 28일은 주말을 맞아 핸드폰,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 중앙처리장치(CPU) 등 각종 컴퓨터 부품을 구매하러 온 손님들로 북적였다. 직장인 장린펑(25)씨는 "그래픽카드를 구매하려고 왔다"면서 "인터넷으로 사도 되지만 직접 와서 보는 재미가 있다"고 말했다.
전자상가 내 상점들에선 중국의 마이크론 제재에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지난달 중국 정부는 미국의 D램 세계점유율 2위 제조업체인 마이크론 제품 수입을 금지하며, 미국의 반도체 제재에 맞불을 놓았다. 상가 내에서 D램이나 SSD를 판매하는 상인들은 최근 들어 마이크론 제품이 입고되지 않고 있지만 문제가 전혀 안 된다고 말했다.
이곳에서 20년 넘게 장사를 했다는 한 점주는 "최근에 마이크론 제품의 입고가 줄었는데, 애초에 마이크론은 중국에서 인기가 없었다"면서 "삼성전자나 즈타이(ZHITAI) 제품을 찾는 손님이 가장 많고, 킹스톤 제품도 판매량이 높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매대에는 삼성전자의 최신 SSD와 DDR5, 중국 메모리 반도체 제조회사 양쯔메모리테크놀로지(YMTC)의 대표 브랜드인 즈타이의 제품들이 다수 진열돼 있었다.
사실 지금은 삼성전자 제품이 제일 좋기도 하고 많이 팔리기도 하죠. 하지만 중국인으로서 중국 제품의 기술력을 높이 평가합니다. 곧 (중국 제품이) 최고가 될 겁니다.
중관춘 전자상가의 한 상인
매장에서는 미국 회사 엔비디아(NVIDIA)의 지포스 RTX 4090과 4080 등 최신 그래픽카드들도 손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미국은 딥러닝 추론, 인공지능(AI) 언어 등의 개발에 쓰이는 엔비디아의 고성능 칩의 중국 수출을 제한한 상태다. 게임 상품을 판매하는 한 종업원은 "엔비디아 전체 매출 중에서 중국 내 매출이 3분의 1 가까이 된다"며 "이렇게 엔비디아가 중국에 의지하지 않았더라면 미국이 게임용 그래픽카드까지 수출을 막았을 것"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두려울 게 없다"는 중국 반도체 종사자들
미국의 제재를 비웃기라도 하듯, 지난달 25~30일 중관춘에서는 'ZGC(중관춘) 포럼 2023'이 성대하게 열렸다. 중국은 2007년부터 회의·전시·기술 교역 등을 종합한 ZGC 포럼을 개최해 자국의 과학기술 성과를 과시하고 있다.
시진핑 국가주석은 ZGC포럼 축하 서한을 통해 "새로운 과학기술 혁명과 산업 변혁이 심도 있게 발전하고 있는 지금 인류는 공동 발전의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도 국제 협력과 개방, 공유가 필요하다"면서 "중국은 상생 호혜적인 개방 전략을 확고히 견지하고 있으며, 세계 각국과 함께 손잡고 과학기술 혁신을 촉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은 중국 기술을 제한하는 데 여념이 없지만, 중국은 그에 굴하지 않고 문호를 계속 넓혀갈 것이라는 자신감을 표현한 축사였다.
지난달 30일 행사장에서 만난 중국 업체 관계자들과 학생, 일반 관람객들의 자신감도 하늘을 찔렀다. 한 중국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SMIC는 미국 제재 속에서도 지난해 오히려 역대 최고 매출을 기록했다"며 "현재 SMIC의 가장 잘 나가는 공정은 (성숙공정에 해당하는) 28나노"라며 "미래를 대비하는 선행기술인 선단공정은 천천히 따라잡으면 된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다른 관계자는 "중국은 TSMC를 비롯해 팹리스(설계 전문)부터 후공정까지 각 분야의 대표 회사를 갖고 있는데 두려울 게 없다"고 전했다. "TSMC는 대만 회사 아닌가"라는 기자의 반문에 "대만과 중국은 하나의 나라"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중국의 눈은 이제는 반도체를 넘어 AI에 대한 관심에 쏠려 있다. AI 관련 연구원에 재학 중인 한 학생은 "증강현실(VR)를 활용해 원자구조를 관찰하는 AI 프로그램을 만든 회사에서 인턴을 하고 있다"면서 "하루에 강연이 20개씩 있어 다 들을 수는 없지만 조금이라도 업계 동향을 알아보고 싶어서 참여했다"고 말했다. 음식물쓰레기 처리업체의 임원인 천이위엔(36)씨는 "이제 중국인들은 재생에너지와 친환경까지도 관심을 갖고 있다"며 "우리는 AI를 활용해 음식물쓰레기 처리의 진행과정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해 환경보호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자 한다"고 했다. 천씨는 "여기에 있는 기술이 중국의 미래"라며 "미국은 신경쓰지 않고 우리는 우리 길을 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창업거리에도 넘치는 활기
중국 벤처 창업의 중심지인 중관춘창업거리도 여전히 활기가 넘쳤다. 중관춘창업거리는 원래 구 서점가였는데 중국 정부가 대중창업 만인혁신(大衆創業 萬衆創新)을 기치로 스타트업의 요람으로 육성했다.
창업거리의 대표적인 창업카페인 처쿠(車庫)카페에서는 한 컨설팅업체의 창업 강의가 한창이었는데, 수강인원만 30명이 넘었다. 처쿠카페 옆 건물의 베이징대 산하 창업훈련캠프에는 스타트업 10여 곳이 입주해 일하는 직원들로 북적였다. 곳곳의 카페에선 창업을 준비하거나, 스타트업을 준비 중인 젊은 기업가들이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한 마웬핑(34)씨는 "홍콩에 있는 미국 증권회사에 다니다가 동료들과 반도체 전문 투자 분야로 창업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창업거리 한 켠의 스튜디오에서는 국내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스타K'를 떠올리게 하는 중국동방위성TV의 스타트업 오디션 프로그램 '유니콘을 만나다' 촬영이 한창이었다. 방송국 관계자는 "심사위원들의 심사를 거쳐 선발된 스타트업 CEO가 출연해 회사를 소개하면, 투자사와 연결해주는 방식"이라며 "우리 프로그램에 나오려는 회사들이 줄을 섰다"고 으스댔다.
결국 돈으로 사람 몰릴 수밖에
중국 반도체 산업 종사자들이 하나같이 숨기지 않았던 이런 자신감은 세계정세를 몰라서 생긴 '허세'에 불과한 것일까? 현지 전문가들은 이런 자신감엔 근거가 있다고 입을 모은다. 막대한 자본과 시장, 뛰어난 인적 자원이 있는 한 중국의 반도체 굴기는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달성할 수 있는 목표라는 것이다.
중국 반도체 투자 업계에서 일하고 있는 전문가 이병덕씨는 "일본의 불화수소 수출 규제 이후 한국의 중소 소재 기업이 성장했듯, 미국 제재가 중국 반도체 산업의 생태계를 만들어 준 밑바탕이 됐다"며 "지금의 중국 반도체는 보조금을 살포하는 초보적인 방식이 아니라 중국의 국가반도체펀드와 민간 투자시장이 자체적으로 산업을 육성할 정도로 펀더멘털이 좋아졌다"고 설명했다. 이어 "결국 자본이 있으면 사람과 기업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며 "미국, 일본, 대만, 한국 기술자들이 높은 연봉을 제시하는 중국으로 향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덧붙였다.
고영화 원장은 "베이징, 상하이뿐 전국 각지에서 반도체 관련 우수한 회사들이 우후죽순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면서 "베이징에는 칭화대, 허페이는 중국과학기술대, 우한은 화중과학기술대, 선전은 선전기술대학 등 좋은 학교가 많다 보니 좋은 인재가 나오고, 좋은 인재가 나오니 경쟁력 있는 기업이 나올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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